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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적인 삶

이규호 목사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은 사람이 있었다. 법 없어도 살 사람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인품이 좋은 사람이었다.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어 마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런데 마을에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수사가 진행되었고 얼마 후 범인을 잡았는데, 놀랍게도 사람들이 칭찬하던 그 사람이 범인이었다. 그는 교회에서 예배드리다가 붙잡혔다.  이처럼 사람들 가운데 겉과 속이 다른 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일컬어 흔히 “야누스”라는 표현을 쓴다. 사실 야누스는, 로마시대 집이나 도시를 지키는 수문장의 역할을 했다. 그래서인지 로마를 세웠다고 전해지는 로물루스를 시작으로 모든 종교의식에서 가장 먼저 재물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야누스가 얼굴이 두 개라고 알려진 것은, 당시 출입구에는 앞뒤가 따로 없어서 야누스가 문 안팎을 지켜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영어의 1월을 뜻하는 January도 “야누스의 달”이라는 뜻의 라틴어 야누아리우스(Januarius)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그러니까 문 안팎을 지켜주던 수호신이 오늘날 겉과 속이 다른 인물로 비유되는 것은 의미가 다소 와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겉과 속이 다른, 혹은 이중적인 삶을 외식(外飾)이라고 말하는데 이 외식이란 단어는 연극배우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배우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인생을 자신의 것으로 연기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삶이 아니라 대본대로 다른 사람의 인생을 흉내 내고 있을 뿐이다. 다른 말로는 위선인데, 겉과 속이 다른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런 행태가 작게는 가정에, 넓게는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요즘처럼 자녀들에게 투자를 많이 하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쏟는 시기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자녀들이 더 잘못된 길로 나가는 경우가 많이 생겼다.


며칠 전에 필자에게 상담하러온 두 부류의 사람이 있었는데 그중 한 부류의 자매는 22살의 여대생이었다. 지금은 휴학(休學)을 하고는 요양소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신앙의 가정에서 자란 그가 부모의 이중적인 삶에서 지칠대로 지쳐 조현병((調絃病 정신불열증으로 사고의 장애, 망상·환각, 현실과의 괴리감, 기이한 행동 등의 증상을 보이는 정신질환. 예전에는 정신분열증 또는 정신분열반응이라고도 했던 병으로 2011년 약사법 일부 개정 법률 안에 따라 조현병으로 칭함) 증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교회에서는 헌신적으로 섬기며 본을 보이는 삶이지만 가정에 들어와서는 폭력적이고 또 부모가 너무나 잦은 싸움으로 인하여 환청이 들리더니 급기야는 정신분열증으로 진전(進展)이 되었다. 또 한 형제는 현재 36살의 미혼인데 그는 친구가 없다.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는다. 오직 방안에서 컴퓨터와 종일 살고 있다. 그는 명절이나 특별한 날 친척들이나 가족들이 모여도 방에서 나오지 아니한다. 그 원인에 대해 아버지의 이중적인 모습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교회에서는 그렇게 순하고, 점잖고, 인자한 분이 집에 와서는 엄한 분으로 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이들은 사소한 것에 자신을 포기(抛棄)하고 모든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轉嫁)한다.


부모의 심한 갈등은 아이들의 정서에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특별히 신앙의 가정은 더욱 그러하다. 교회생활과 가정생활이 이원화되어 있을 때 아이들은 더욱 혼잡을 느낀다. 그래서 자녀들은 부모가 믿는 신앙을 싫어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먼저 부모들의 이중적인 생활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자라나는,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구성원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고, 고통을 줄 수가 있다.


예수님께서도 간음한 여인, 동족의 피를 빨았던 세리들, 자신을 십자가에 달리게 했던 로마 병정들을 용서했지만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서는 심하게 질책하셨다. 목회자가 가정이나, 교회이나, 동료들을 향해 외식하는 삶, 혹은 부모들의 이중적인 생활이 성도들과 자녀들에게 지대하게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이중적이고 외식하는 이면에는 이기적인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렇게 이기적일까? 여기에 대해 애덤 스미스는 “인간애(이타적인)의 여린 힘으로는 자기애가 일으키는 강력한 충동을 이겨낼 수 없어서라고 한다. 삶이 너무 빠듯하면 많은 사람들이 너무 근시안적(近視眼的)으로 살게 된다. 그래서 삶이 각박하고 질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 삶은 반드시 갈등이 유발되고 그것은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없다. 그러므로 좀 거시적인(巨視的) 안목이 필요하다. 지금보다 미래를 보고 인내를 하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또 유사한 면에서 요즘 사회를 떠들썩하게 나오는 사건이 있는데 바로 어린이 학대사건이다. 우리는 요즘 해외토픽에서나 듣던 매우 불편한 보도를 연일 접하고 있다. 부천 11세 여아 학대사건 이후 개별 교육청과 경찰이 갑자기 등교 안하는 학생들 전수조사를 하고 있는 덕분에 놀라운 부모들, 숨겨진 살인자들이 속속 나오고 있는 것이다. 부천 여중생 백골사건 역시 장기 결석자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고 한다.


살인자가 친부(親父)이며 목사라는 신분 외에도 독일 유학파 박사에 유명 신학대학교 겸임교수였다는 것을 차치하고도, 딸이 사망하기 전날 5시간을 때린 폭행범이 기도를 하면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는 신앙인이었고, 경찰에 가출신고를 하고 들어와 방향제와 청국장으로 냄새를 가렸다는 사실이다.

살인자의 이중성과 위선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것, 외식하는 것이 큰 문제로 야기 될 수 있는 가운데 우리는 그가 태연하게 재연했다는 현장검증 보도를 보며 나하고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자신감으로 격정의 목소리를 내고 있지는 않은지? 또한 나의 가정과 내 주변에서 나는 이렇지 않다고 얼마나 자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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