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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단은 ? ! .

한명국 목사의 회상록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고 전도사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에 사람 사는 집에 성경의 좋은 말씀을 가르쳐 주려고 찾아온 사람을 문전박대로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어찌 저렇게 박정하게 말할 수 있을까?” 교회에 나간 지 얼마 안된 어린 나였지만 믿는 사람으로 너무 야박하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은 의문(?), 다음엔 놀람(!), 그리고 결론(.)으로 이단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그런 후 “파수대”라는 책자를 가지고 집집마다 골라 교인 집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이단”이니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고 내어 쫓으라고 설교 중에 또 크게 말씀하셨는데 그때가 1951년 8월 3일 처음 교회에 나간지 한 달쯤 지났으니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한 후였으리라. “이단”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다를 이(異) 끝 단(端) 자로 처음은 신앙이 같은데 끝이 다르게 변질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요이1:10~11)


저동교회에 같이 나가는 동창생 이진호와 김성화 등과 얘기도 나누었다. “나는 교회에 나가서 예배하고 성경을 배우고 있으니 이제 ‘파수대’ 공부는 그만 하겠다”고 했으나 그는 일요일 아닌 토요일 오후에 찾아와서 더욱 친절하게 인사하며 잘 가르쳐주었다. 사람 사는 집에 온 손님을 문전박대할 수 없어서 몇 주 지나다가 전도사님과 상담한 후 시킨대로 단호하게 거절했고, 그래도 찾아오기에 성경말씀대로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안했더니 그래도 계속 달라붙어서 할 수 없이 큰 소리쳐 매정하게 여호와의 증인을 쫓아내고 나니 ‘무엇이 이단인지?’ 확실히 모르는 나로서는 매우 아쉽고 미안한 마음이 남았었다. 이단자들을 만나고 토론한 일들 중에 다음 몇 가지를 들어본다.


그 후로 대구서 영남고등학교를 다닐 때 두 사람씩 짝지어 다니면서 전도하는 몰몬교의 외국인 전도인을 보았고, 대학교에 다닐 땐 제칠일 안식교도 외국산의 이단이라 했고, 국산 이단으로 문선명 씨, 박태선 장로 얘기가 있었고, 신대원에 다닐 때 신도안의 세계일가공회를 설립한 양도천 씨를 만나기 위해 갔다. 대전 대흥침례교 옆에 있는 대전공회당에서 그의 간증을 들었을 때 감명이 깊었다. 낙도에서 7년간 수도하면서 “에이 이놈이 나를 괴롭게 한다고 칼돌로 자기의 고환을 잘라냈다”고 간증하는 말이 충격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4:1)


신도안에 간 길에 여호와 새일교 교주인 이유성씨를 만나러 그 집회에 참석했다. 원래 부산 영도의 봉래동 침례교회 전도사였는데 우뢰의 음성을 들었다고 이름을 “우뢰의 아들” 곧 이뢰자라고 고쳤고 새일교를 만들었다고 했다. 저녁집회에 참석 후 이튿날 새벽기도 후 그를 대면하여 복음에 대해 대화중에 격론을 벌렸는데 몇 사람의 직원들이 밀쳐내어 하산했다. 그가 죽었을 때 새일교인들이 부활한다고 믿어 일주일이 지나도 장례식을 치루지 않아 신도안 경찰서에서 올라와 강제로 장례를 치뤘다고 들었다. 신대원 졸업 후 목회를 하면서도 옛날 처음 교회에 가서 이단에 대해 받은 인상 때문에 계속 이단자가 누군지 탐색하고 만나 토론하고 회개를 촉구하며 목회중에 만난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수십명 구출하여 내기도 했었다.


1961년 당시 박태선 장로의 집회에 참석했을 때는 이단시비가 없을 때라 좋은 인물과 체구에다 설교에 잘못된 점을 느끼지 못했으나, 한국교회가 이단으로 천부교(전도관)를 정죄한 뒤에 박태선은 스스로 동방의 의인으로 자부했고 그를 따른 집단인 영생교의 조희성, 한국기독교 에덴성회의 이영수, 대한기독교 이삭교회의 김종규, 장막성전의 유재열, 천국복음 전도회의 구인회, 실로등대중앙교회 김풍일, 한국기독교 승리제단 이현석, 동방교 노광공, 한국중앙교회 김순린, 대한기독교 전도단 권옥찬, 산성기도원 계정열, 신천지 교회의 이만희 등 11개 이단집단 지도자들은 자칭 모두 “재림주”로 나타났다고 이단자료 책자는 말한다.

부산에 목회하고 있을 때 재림주 구인회씨의 부흥회에 참석해 주시해 보았는데 설교 하나 반듯하게 하지 못했고 인격 또한 그러했다. 나중에 들으니 투옥되었다고 전해 들었다. 그중에 근래에 와서 정통교단을 좀 먹는 골칫거리로 가장 경계해야 할 과천의 이만희 이단집단이다.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살후2:9~10)


1955년 대구 양끼시장 2층에서 열린 나운몽 장로의 집회에 참석하였고 그 후 염 집사의 입신 간증도 들었다. 1965년 군에 입대하기 전 고향길에 용문산 기도원에 들러 7일간 기도하고 입대한 일이 있었다. 나운몽 장로는 1969년 당시 한국에 있는 비중있는 신학교 학생회장을 여름 산상집회에 강사로 초청했다. 몇 번 주저하다가 다른 신학교 학생회장들과 연락한 결과 10여명이 참석한다고 해서 용문산으로 갔었다.  나의 8월 15일 수천명이 모인 야외집회에 오전 10시 설교를 성결교 신학교 학생회장과 바꾸어 17일로 정하고 산꼭대기에 올라 기도한 후 한 시간 넘게 설교를 했다.


당시만 해도 용문산 나 장로는 이단으로 정죄되기 전이었으나 이단성에 대해 말이 오가고 있었기에 들어온 내용 중에 몇 가지를 지적하고 고칠 것을 소리 높여 설교했는데 뒤에 들으니 집안에서 마이크로 듣고 있던 나장노가 분노해서 뛰어내려와 나의 설교를 더 이상 못하게 명령하여 집행부 요원들이 나에게 손짓하여 더 못하게 하므로 마무리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강단에서 내려온 나에게 안수 받으러 따라온 30여명에게 기도해 주었는데 2년간 대장설사로 고생한 사람이 고침받았고 트럭기사도 주님의 은혜로 즉시 위암이 고침받았다고 전해 들었다.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벧후2:1)


통일교의 문선명 교주는 두 여인과 결혼한 후, 17세의 한학자를 만나 전부 슬하에 14명이 생존한다고 했다. 그는 교회의 집사로 시작하여 평양에 광해교회를 세우면서 김백문의 저서 “기독교 근본교리”에 영향을 받아 자신이 체계화한 자신의 책자를 낳았다. 신학대학교 시절 영자로 된 “원리강론”을 읽었다. 저자는 이화여대 문리과대학장으로 문선명 집회에 참석 후 매료되어 김활란 총장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떠나 통일교에 귀속된 자라고 했다.
70년대 초 경기도 수양관에서 열린 원리강론 집회에 참석하여 문 교주를 만나면 잘못된 내용들로 논쟁을 벌리려 참석했으나 온다던 문씨는 안보이고 5일이 지났다. 500여명의 참석자들에게 강의소감을 적어 달라 해서 문 씨가 기계학을 전공하여 성경을 기계적으로 짜집기한 것, 남녀성, 음양 및 영육, 이원론에서 피가름의 원리, 사탄이 미성숙한 하와와의 성관계를 선악과를 따먹은 원죄, 동방의 재림주 및 참부모 등 잘못된 것을 두장 종이에 지적했더니, 나의 소감 내용을 들고 나와서 이름을 부르며 즉시 나오라고 소리치며 야단법석이었다. ‘지금이라도 잘못 가르친 것을 고치면 되지’라고 생각하며 그윽이 뒷자리에 앉아 웃고 나왔다.


수년전 한기총에서 통일교(세계기독교 통일신령협회)에 대하여 기독교 TV에 나가 말할 사람을 3개월간 찾다가 결국 사무총장 정 장로는 나를 찾아와 나가 달라 해서 한기총 임원회에서 특별위원장으로 위임받아 한 시간 여러 기자들과 대담한 일이 있었다. 염려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사실 그대로를 진솔하게 묻고 대답한 아주 좋은 대담이었다고 한기총 대표회장과 사무총장의 전화를 받고 여담을 나눈 일이 있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24:4-5)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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