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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는 복음 소비자인가?

“하늘 붓 가는대로”-74

웬 세상에 별일이 다 있는 것 같다.

열대 사막에서 난로를 팔고 추운 지방에서 냉장고를 팔며 사하라 사막에서 스키기구를 팔아서 돈 버는 기업 세상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상술(商術)이라 하고 마케팅 정신이라 한다.
마켓 3.0시대의 브랜드 관리자는 소비자의 욕구에 맞춰 브랜드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야단들이다. 그러고 보면 브랜드 관리자가 지닌 고유한 상품은 없다. 오직 소비자의 욕구에 따라 유동하는 제품만 그 때 그 곳에 출현했다가 어느 사이에 또 사라진다.


묻노니 복음도 상품 복음인가? 성도는 복음의 소비자인가? 성도의 욕구와 기호에 따라 복음이 바꿔져야 하는가? 복음도 일종의 브랜드란 이름을 붙여야 잘 팔리는가?
우선 보기에 그런 것 같다. 기독교 방송에서 고정적으로 출연하는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설교를 듣고 있노라면 브랜드 설교 경연대회같이 느껴지는 서글픔이 있다. 설교자는 복음 생산자가 아니라 단순한 선포자이다.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복음 선포자다.


병원에서 치료행위도 있지만 반드시 영안실이 있다. 비행기를 타도 탈출구와 탈출방법부터 가르친다. 달리는 버스 벽에도 파괴 망치가 비치되어 있으니 만약의 경우 깨고 탈출하라는 경고문이 있다.
그런데 교회에도 탈출구가 있어야 하나? 교회에도 영안실이 있어야 하나? 물론 아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소위 제도교회(?)에는 그런 것들이 있어야 할 것 같은 위기의식을 느끼기에 마침내 생겨난 것들이 파라처치운동(para church movement) 아닐까?


프랑크 바이올라와 조니 바나가 그의 저서 “이교에 물든 기독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지만 이 믿음의 혁명은 도전을 받는다. 이 혁명에 가담한 사람들은 그들이 어디에서 떠났는지 알고 있다.
- 생명력 없고 제도로 가득한 형태의 신앙을 타개하기 위해서. 그런데 그들은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가정집 교회, 상가 선교, 사이버 교회, 독립 공동체 예배 모임, 계획 공동체, 이런 형태의 교회들이 다 매력적이긴 하지만 그것들이 진정 하나님의 최종 목적을 향한 의미있는 발걸음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단지 무대만 바꿔놓은 똑같은 것들일까? 역할을 달라진 게 없으면서 다만 새로운 이름으로 다른 배역들을 동원한 것은 아닐까? 교회가 단순히 변화(change)가 아닌 근본적인 탈바꿈(transformation)에 역점을 둬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린 너무 변화에만 치중하는 환경에서 우리가 살고 있지는 않은가? -38p

최근 미국 교회들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이것의 좋은 예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영적 관습의 주요 변화는 주로 진열장에서 물건을 고르는 식이었다.


유행을 고르라 ? 대형교회, 구도자를 위한 교회, 위성교회(satellite campuses), 여름 성서 학교, 어린이를 위한 교회, 맞춤형 사역(예를 들면 싱글들을 위한 사역, 여성을 위한 사역, 남성을 위한 사역, 결혼한 청년들을 위한 사역 등), 최근 예배 음악, 대형 화면 프로젝터 시스템, 온라인 헌금, 셀 그룹 교회, 다운로드 할 수 있는 설교, 주보에 실린 설교 개요, 알파 코스, 위에 열거한 것들은 단순히 마케팅 전략을 의지한 시도들이었다.


오죽하면 제도교회를 떠났을까? 이런 파라처치운동에도 부정적인 점이 있지만 우리가 긍정해야 할 점도 많이 있다. 문제는 제도교회이든 파라처치이든 하나님이 원래 뜻하신 교회로 돌아가면 된다.
세상에는 상술(商術)이 통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영력(靈力)이 통한다. 세상 사람들은 물론 그리스도인들마저도 영적(靈的)이라는 말에는 거부 반응을 표하고 세상적이니 문화이니 하며 호감을 갖는 것이 악한 세력의 막후 조정이라는데에 전혀 의심치 않는다.
참된 의사는 환자의 비위를 맞추지 않고 옳은 진단에 따라 처방하고 수술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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