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마태복음 5, 6, 7장은 복음인가? 율법인가?

“하늘 붓 가는대로”-75

마태복음 5, 6, 7장을 통칭 산상수훈이라 칭한다. 이 제목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예수님이 산에서 내리신 교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훈이라 하기엔 우리에게 너무 무거운 짐인 듯해서 통칭하던 수훈이라 하지 않고 장수를 말하게 된 것이다. 평상시에는 필자도 산상수훈으로 부담없이 부르고 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5:39~41) 나눠 줘야 한다는 교훈에 이르러서는 선뜻 실천하기가 그리 쉽지 않은 것 같다.

서강대학교 영문학 교수였던 고 장영희 씨는 그의 에세이 내 생애 단 한 번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었다. 그는 가톨릭 신자로서 신부가 옆 좌석에 있는 사람들과 각인이 지금 갖고 있는 것으로 서로 나눠 주기를 해 보라고 해서 겪은 경험이라고 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가방이나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서로 나눌 물건들을 찾기 시작했다. 봉헌금만 가지고 달랑 맨 몸으로 갔던 나는 당황했다. 아무리 주머니를 뒤져 봐도 차 키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차 키를 준다? , 말도 안되지. 그럼 뭐가 있을까? 궁여지책으로 내 몸뚱이에 걸친 것들을 생각해 보았다.


목에 맨 스카프? 100% 실크이니 아마 2~3만원은 할 걸. 귀걸이로 말하자면 금 아닌가. 금 한 돈 쯤 된다쳐도 5만원은 할 것이다. 목걸이는 아마 그보다 더 비싸겠지? 대충 6~7만원? 평상시 숫자라면 백치에 가깝도록 무능한 나의 두뇌가 못 줄 이유를 찾기 위해서는 놀랍게도 섬광처럼 빠른 속도로 내가 지닌 물건들의 가격을 계산하고 있었다. 내 새끼 손가락에 끼워진 실반지, 이것은 가격으로야 얼마 나가지 않겠지만 학생들이 해준 선물이다. 못 주지. 암 못 주고 말고. 그럼 재킷? 낡긴 했어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옷이고 이 맘때쯤이면 교복처럼 입는 옷이니 그것도 줄 수 없다. 그럼 거기에 꽂힌 브로치? 하지만 세트로 된 것이라 하나를 줘 버리면 나머지는 짝짝이가 될 터라 그것도 못 주겠고.


무소유를 생활철학으로 한 법정스님도 고무신 한 켤레와 그가 손수 만들었다는 나무의자 하나는 끝까지 소유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야고보서 2:10을 보자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결국 그녀에게는 못 줄 이유만이 자기를 사로잡더라는 고백이었다. 참으로 나누 주기 행위가 힘이 어려운 것이었다. 도대체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했을 때 우리가 그것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을 전제로 했을까? 예수님은 우리들의 도덕적 실천 능력에 대해 그렇게 무지했을까?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실천 불가능한 교훈을 줬을까? 산상수훈의 최정점에 이르면 우리는 못하겠습니다라고 손들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5:48)

어떤 사람들은 할 수 있는 데까지 그냥 최선을 다해 보면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목표에 이르지 아니한 노력은 죽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소위 산상수훈 의미에 영적 안목이 열리더라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은 아니었다. 그 내용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 편에서 그것을 실천할 수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럼 그게 뭐냐? 율법이다. 율법이면 어떠하냐?


예수에게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예수는 율법의 요구 즉 형벌 곧 죽어 주셨다. 우리는 그런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가 구세주시고 죄와 사망과 율법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 주신 주님이시라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서도 안 한 것도 없다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산상수훈대로 하지 않았으면서도 산상수훈을 실천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는다. 즉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말이다. 이게 복음 아닌가? 산상수훈을 아직까지도 율법으로 알고 실천해서 무엇을 얻으려는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답답하다. 산상수훈은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일상생활 양상일 따름이다.

水流(수류) 권혁봉



배너

총회

더보기
회복과 협동의 능력을 보여주는 침례교회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이사야 43:19) 새해를 은혜로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팬데믹에서 엔데믹으로, 코로나에서 자유하게 하시고, 침체된 교회들이 회복의 문턱을 넘어 서서 활기차게 성장할 기회를 주신 것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고통스러운 터널에서 견디게 하시고, 인내와 절제를 통해 새로움을 기대하게 하셨으니, 새해에는 고통스러웠던 모든 옛 일을 딛고 일어서며, 다시 시작하는 마음과 결단으로 새시대를 열어 나가겠습니다.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세상사람들 가운데 어떤이들이 말하기를 교회에는 희망이 없다고도 말합니다. 교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한 이유도 있고, 이단들의 폐혜를 본 사람들도 있으며, 여러 사회적 상황속에서 무작정 불신이 팽배한 이유가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이 땅의 희망이자 소망입니다. 세상의 마지노선은 오직 교회 뿐입니다. 세상을 지키고 의와 생명을 주는 최종병기는 예수그리스도가 주인이신 오직 교회입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생명을 허락하셔서 성령님으로 몸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랑과 희망이 교회이기에, 세상도 여전히 교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