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 6, 7장을 통칭 산상수훈이라 칭한다. 이 제목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예수님이 산에서 내리신 교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훈이라 하기엔 우리에게 너무 무거운 짐인 듯해서 통칭하던 수훈이라 하지 않고 장수를 말하게 된 것이다. 평상시에는 필자도 산상수훈으로 부담없이 부르고 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마5:39~41) 나눠 줘야 한다는 교훈에 이르러서는 선뜻 실천하기가 그리 쉽지 않은 것 같다.
서강대학교 영문학 교수였던 고 장영희 씨는 그의 에세이 “내 생애 단 한 번”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었다. 그는 가톨릭 신자로서 신부가 옆 좌석에 있는 사람들과 각인이 지금 갖고 있는 것으로 서로 나눠 주기를 해 보라고 해서 겪은 경험이라고 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가방이나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서로 나눌 물건들을 찾기 시작했다. 봉헌금만 가지고 달랑 맨 몸으로 갔던 나는 당황했다. 아무리 주머니를 뒤져 봐도 차 키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차 키를 준다? 하, 말도 안되지. 그럼 뭐가 있을까? 궁여지책으로 내 몸뚱이에 걸친 것들을 생각해 보았다.
목에 맨 스카프? 100% 실크이니 아마 2~3만원은 할 걸. 귀걸이로 말하자면 금 아닌가. 금 한 돈 쯤 된다쳐도 5만원은 할 것이다. 목걸이는 아마 그보다 더 비싸겠지? 대충 6~7만원? 평상시 숫자라면 백치에 가깝도록 무능한 나의 두뇌가 못 줄 이유를 찾기 위해서는 놀랍게도 섬광처럼 빠른 속도로 내가 지닌 물건들의 가격을 계산하고 있었다. 내 새끼 손가락에 끼워진 실반지, 이것은 가격으로야 얼마 나가지 않겠지만 학생들이 해준 선물이다. 못 주지. 암 못 주고 말고. 그럼 재킷? 낡긴 했어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옷이고 이 맘때쯤이면 교복처럼 입는 옷이니 그것도 줄 수 없다. 그럼 거기에 꽂힌 브로치? 하지만 세트로 된 것이라 하나를 줘 버리면 나머지는 짝짝이가 될 터라 그것도 못 주겠고….
무소유를 생활철학으로 한 법정스님도 고무신 한 켤레와 그가 손수 만들었다는 나무의자 하나는 끝까지 소유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야고보서 2:10을 보자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결국 그녀에게는 못 줄 이유만이 자기를 사로잡더라는 고백이었다. 참으로 나누 주기 행위가 힘이 어려운 것이었다. 도대체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했을 때 우리가 그것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을 전제로 했을까? 예수님은 우리들의 도덕적 실천 능력에 대해 그렇게 무지했을까?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실천 불가능한 교훈을 줬을까? 산상수훈의 최정점에 이르면 우리는 “못하겠습니다”라고 손들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어떤 사람들은 할 수 있는 데까지 그냥 최선을 다해 보면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목표에 이르지 아니한 노력은 죽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소위 산상수훈 의미에 영적 안목이 열리더라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은 아니었다. 그 내용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 편에서 그것을 실천할 수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럼 그게 뭐냐? 율법이다. 율법이면 어떠하냐?
예수에게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예수는 율법의 요구 즉 형벌 곧 죽어 주셨다. 우리는 그런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가 구세주시고 죄와 사망과 율법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 주신 주님이시라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서도 안 한 것도 없다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산상수훈대로 하지 않았으면서도 산상수훈을 실천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는다. 즉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말이다. 이게 복음 아닌가? 산상수훈을 아직까지도 율법으로 알고 실천해서 무엇을 얻으려는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답답하다. 산상수훈은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일상생활 양상일 따름이다.
水流(수류) 권혁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