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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가운 착의에 관하여

고성우 목사 / 반조원교회

내가 목사 안수 받을 때에 안수식 순서에 목사 가운 착의 순서가 없었다. 당연히 목사 가운을 따로 준비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군목으로 임관하니 목사 가운이 스톨과 함께 여름 겨울용 각 한 벌씩 군복처럼 지급됐다. 하지만 나는 제대할 때까지 한 번도 입지 않았다.

그런데 제대하고 부임한 교회가 속한 지방회에서 목사 안수식에 갔더니 식순에 목사 가운 착의 순서가 있었다. 그 때부터 몇 해 전까지 지방회 관례라고 여기고 그냥 별 생각 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그런데 어느 교단 안수식에 갔는데 마치 천주교 사제 서품식을 흉내 낸 듯 했다(천주교 사제 서품식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지켜보는 내내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때 우리가 해온 안수식 순서를 되짚어보면서 목사 가운 착의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이것이 과연 성서적이며 계속 이어가도 좋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 작년 지방회 자체적으로 하는 세미나에서 이 주제를 가지고 간략하나마 발제를 했는데 그 중에 목사 가운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하는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러기 전에 침신대 김승진 교수가 침례신문에 기고한 <자유교회 전통 속에 있는 침례교회-2> 중 일부를 먼저 소개한다.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은 성서를 가지고”(with the Bible) 당시의 로마가톨릭교회를 많은 부분들에서 개혁(reform)은 했지만, 그들이 개혁한 교회가 충분히 성서로”(to the Bible) 회복(restore)은 이루어지게 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신약성서적 교회로의 파격적인 회복(restitution) 혹은 철저한 환원(restoration)을 하지는 못했다. 여기에 루터와 쯔빙글리와 칼빈 등 주류종교개혁가들의 종교개혁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16세기라는 시대의 아들들”(sons of the 16th century)로서의 한계이기도 했다. 그들이 당시의 세속권력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했던 것이다.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의 의식 속에는 로마가톨릭적인 잔재들과 구약성서적인 요소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었다. 구약성서적인 신정정치적(theocratic) 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것이라든지, 유아세례를 구약의 할례(circumcision)와 연결시킨 것이라든지, 주의 만찬에서 로마가톨릭교회의 성례전주의”(sacramentalism)적인 요소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중세의 로마가톨릭교회와 신약성서적 교회 사이에서 어정쩡한 타협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목사 가운에 대해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


첫째 우리 침례교회는 온전히 신약성서로 돌아가자는 환원주의적 입장이다. 그런데 목사 가운에 대한 성서적 근거는 전혀 없다.

성서에 근거해서 볼 때 가톨릭에서 사제직에 대해 주장하는 것처럼 목사직만이 신적 권위를 갖는 것이 아니므로 목사를 특별한 신적 권위를 지닌 자로 보이게 하려는 시도를 거부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둘째 우리 침례교회는 자유교회적 교회관을 지지한다. 그런데 목사 가운은 개신교 중에서도 국가교회적 교파에서 준 공직자로 여겨진 목사가 관료가 입는 세속 복장을 입은 데서 유래되었으므로 교회와 국가의 분리라는 측면에서도 충돌이 일어난다.

셋째 기독교에는 이방 풍습에서 따온 형식도 오랜 교회의 전통과 의식을 거쳐서 새롭고도 정당한 의미를 갖는 경우가 더러 있다. 또 그런 의미에서 목사 가운의 출발과 발달 과정이 신약 성경의 의미와 크게 관련이 없다할지라도 일단 교회의 전통으로 자리 잡고 또 특별한 의미를 그것에 부여하면 나름대로의 뜻과 효용가치를 지니게 될 수도 있다. 또한 어떤 형식이 있음으로 해서 내용이 더 살아나는 특수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목사 가운이 복음 증거에 무슨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성도의 삶에 무슨 유익을 줄 수 있겠는가? 단지 공중예배에서 엄숙성과 장엄함을 고양하는데 약간의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목사의 권위(?)를 강화시키고 성도와 수직적 구별을 뚜렷하게 하는 물리적 수단으로 작용하는 부정적 측면이 훨씬 강할 수 있다.

가톨릭에서 예복의 목적은 사제의 위대함과 존경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는 것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로서 성제(聖祭)’를 드리기 위해서라는 것인데 이를 부연하면 성직의 구별과 분위기 조성, 직위 구분과 권위의 뜻을 지닌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성은 풍유(諷諭, Allegory)적이어서 복음주의 신앙 이념과 합치하지 않는 구교의 문화적 산물로서 개혁이 되어야 할 대상이었는데 그것을 따라할 필요가 있겠는가?

목사 안수식에 목사 가운 착의 순서를 계속해야 할 것인가?

우리의 자유정신과 그에 의거한 개교회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목사 개인이 개 교회에서 가운을 입는 것은 그 교회와 목사가 선택할 문제로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지방회 차원에서는 성경만이냐? 아니면 거기에 전통을 더할 것인가?’를 우리 교단 공동체가 지향하는 신념 아래서 냉철하게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위 내용 중 일부는 여러 연구들에서 인용한 것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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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1:3) 2024년 부활절을 맞이하여 3500침례교회와 목회 동역자. 성도들 위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과 기쁨과 회복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죄인으로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이 부활의 기쁨과 감격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이 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직접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며 이제는 구원의 완성으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몸소 가르치시고 보여주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주신 사실을 믿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 분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가르치셨으며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고난 받는 자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그 회복을 통해 우리는 이 땅에 믿음의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 공동체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놀라운 소식입니다. 이 소식이 복음의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