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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법 아가페

한명국 목사의 회상록

크리스천 실존주의 철학자 덴마크의 키에르케고르의 글을 비롯해 칼 바르트(Bart), 에밀 브룬너(Brunner), 불트만(Bultmann), 내게 감명을 준 술라이엘마허(Schleiermacher), 리츨(Ritchl), 틸리히(Tillich), 람세이(Ramsay), 외에 칸트(Kant)와 헤겔(Hegel) 등 철학자도 있지만, 평생 가장 존경하고 기억되는 훌륭한 목회자요 위대한 신학자의 역작으로 별도의 사전 없이 해독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과 운명”(The Nature and Destiny of Man)은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 교수의 소위 옥스포드 강의로 불렸던 현대신학의 장서를 대학교 3학년 때 세미나 교재로 읽고 졸업 논문을 쓰게 된 동기가 있었다.


사람의 본성과 운명은 무엇이며 어떻게 설명하는가? 인간의 본성 곧 천성은 근본적으로 동물과 다른가?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인간성과 동물성을 함께 갖고 있는가? 인어처럼 몸은 물고기인데 얼굴만 사람인가? 몸은 야수인데 얼굴만 사람인가? 동양의 성선설과 성악설 중에 어느 것이 성경의 진리에 가까운가?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가 아니라면 원래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로 지혜의 사람이었는가? 첨단과학의 현대인 사이에 그 본성은 변하지 않는가?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사랑 특히 아가페와 갈등 사이에 어떤 조화와 매듭을 풀 수 있는가

 

대학시절에 고민했던 내용의 핵심이 그의 저서인 사랑과 법”(Love and Law)에서 발견됐다. 즉 법을 따르자니 사랑이 울고 사랑을 따르자니 법이 우는 세상사로, 구약의 율법을 지키자니 신약의 사랑이 무너지고 사랑을 지키자니 율법이 무너져 패역하고 무질서한 세상이 되고 만다.

그래서 니이버 교수가 쓴 도덕적인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를 읽으면서 내 나름대로 사랑의 법이란 제목으로 세미나 논문을 내었고 학보에도 기고했으나 내가 만든 논문인데 당시엔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아담의 범죄 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본성이 모두 다 무너졌는가? 반만 무너졌는가? 어떤 것은 무너지고 어떤 것은 잔존했는가?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본성과 운명은 회복되었는가? 니이버 교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 아래서 그 해결책을 시도한 모습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내가 깨달은 것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인간이 어떻게 선악으로 달라지든 십자가로 그 해결을 찾았고 오늘까지 50년 넘어 목회와 삶 속에 적용해 보려고 노력해 왔다.


니이버(Niebuhr) 교수는 고국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민한 후 디트로이트(Detroit)에서 13년 목회를 하는 중 포드 자동차 회사의 막강한 재력을 엎고 권력을 배경으로 군림하는 불행한 현실 앞에 힘없는 노동자의 착취를 목격했고, 여기서 개인의 윤리와 사회윤리 사이의 현실적 해결과 정치적 해결 및 신앙적 해결을 시도한 내용이 그의 사회 복음(Social Gospel)이었다. 수많은 도전과 수난, 재벌들과의 충돌에서 빚은 글이 인간의 본성과 운명을 낳았다.


인간은 자기가 다 선하고 의롭고 옳다고 하나 절대 선은 인간에게 없다. 다만 한 분뿐이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예수님도 대답하셨다(10:17~18). 우리가 하나님 안에 관계를 맺는 한 선에 동참한다. 인간이 보는 것은 결국 보이지 않는 동기의 열매이다. 권선징악(勸善懲惡)은 역사의 흐름이다.

악이 어떻게 독버섯처럼 잠식하고 계속 활동하는가? 질문하면서 사랑의 내용에서 의와 선의 주제를 다루고 선으로 악을 이겨라”(12:31)고 강조한다.


위대한 현대 신학자 에밀 브룬너는 니이버 교수는 분명히 최초로 사회적 상황의 비평가로서 세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고 평가했고, 폴 램세이 석학도 니이버는 인간 본성의 분석자이며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자이다. 자연과 도덕적 법 사이에 개인과 사회적 윤리관계를 중요시하였다고 평가했다. 리츨 교수는 니이버의 Love and Law 학설은 법으로서의 사랑, 법의 궁극에 있어서의 사랑과 극한을 능가한 사랑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에릭 프롬은 그의 비평지 인간 자신을 위한 인간에서 니이버 교수는 자유 속에서 인간 자신은 너무나 위대한 것이므로 우발적인 존재 속에 자신을 억누를 수 없다. 그것은 그 자신을 넘어서 헌신의 목적물이면 막연한 우정의 분야라고 평했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근본주의자의 전통은 단지 모든 비종교적 자연법의 관점에서나 연역적으로 선험적(a priori)가치의 학설에서는 희박하다.

인간은 단독자이며, 처음부터 기성품이 아니며, ‘나는 선택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Opto ergo sum)’로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므로 다만 다양한 환경에서도 그의 자유를 희구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니이버의 자유는 인간의 자기 이해, 즉 자신이 무엇이며 무엇이 되느냐에 영향을 끼치는 자유정신을 위한 인간의 사랑은 생활의 법칙을 이끌어 올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구약성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계약으로 표준을 주셨고 신약은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아가페를 그리스도를 통해 주셨다고 니이버는 말했다. 상호애는 자신의 입장에서 역사의 회고의 가능성이며 그러한 사랑은 역사적 칭의로서 공평무사의 상태에서만 이뤄질 수 있다. 상호간의 사랑의 개념이란 상호간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다고 니이버는 말했다.

사랑은 본뜻대로 바로 사랑이다. 사랑이란 한 인간이 자기의 존재와 행복을 추구하므로 인한 인생으로서의 생활에 굴레라고 보겠다. 사랑에는 부주의한 사랑, 수난의 사랑, 자기희생적 사랑이 있다. 사랑이 부주의 함에도 사랑보다 더 주의 깊고 조바심과 융통성이 있으며, 사랑은 고난을 참고 견딤에는 틀림없으나 그 가운데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사랑은 자기 욕구에 대한 희생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즐거워한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타고난 사랑(eros)은 신앙적 긴장 아래서 아가페(Agape)로 변화하게 된다. 사랑을 명령하는 것은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명령할 수도 없고 요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곧 사랑이다. 원래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으로 보여진 그러한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Image Dei)이거나 우리의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본질이다. 완전한 사랑은 하나님과 같이 법을 초월한 영역 내에 있다. 완전한 사랑의 입장에선 사람은 상호이해 관계도, 부주의도, 희생과 고난도 다 초월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이웃과의 관계에 대해 사랑은 인간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고 니이버는 요약했는데 그것은 주님의 새계명에 귀결시켰다고 본다. (계속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

 

/ 한명국 목사 BWA전 부총재 예사랑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