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위력에 대해서는 새삼 재론의 여지가 없다. 특히 지도자의 말은 구성원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느냐, 분열시키느냐를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리더십 덕목이다. 따라서 말을 잘 할 필요는 없다 해도 잘 말할 필요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말보다 더 큰 위력은 웃음에 있다. 유머에 있다. 윈스턴처칠의 리더십도 사실 이것이었다. 물론 그는 노벨문학상까지 탈 정도로 말 잘하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웃음과 유머 역시도 명성이 자자했다.
한 번은 강연을 하러 단상에 올라가다가 그 육중한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걸려 넘어졌다. 그러자 숨죽이며 그의 입장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 웃긴 모습에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처칠은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저 때문에 웃을 수만 있다면 저는 또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더 큰 박수로 화답했다. 결국 그의 그 여유있는 웃음의 리더십이 세기의 영웅을 만든 셈이다.
나도 요즘 성도들로부터 곧잘 듣는 말이 있다. 전에 비해 확실히 그렇다. “목사님. 목사님이 전보다 많이 여유로워지신 것 같아 좋아요. 웃는 모습도 많아지셨고….” 칭찬인지 뭔진 몰라도 하여간 전보다 나아졌다니 감사하다.
그도 그럴 것이 난 요즘 성도들을 보면 그냥 좋다. 누굴 봐도 기쁘고, 사랑스럽고, 귀하고, 고맙다. 예배에 나와 주셔서 고맙고, 봉사해 주시고 헌금해 주셔서 고맙다. 새가족은 새가족대로, 기신자는 기신자대로 그러하다. 나의 이 기쁨이 좀처럼 줄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어느 집사님은 “요즘처럼 신앙생활이 행복한 적은 없었다” 하신다.
그러니 아무래도 웃고 사는 게 좋을 것 같다. 웃는 인생이라야 복이 온다. 웃는 낯엔 침도 못 뱉는다. 낯짝과 낙하산은 무조건 펴져야 하고, 웃을 자신이 없으면 가게 문도 열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웃고 살자.
하지만 이 웃음보다 더 큰 위력은 눈물에 있다. 리더의 눈물은 모든 이들의 가슴을 적신다. 분노를 삭히게 하고, 원망을 내려놓게 하며, 리더와 팔로워를 하나로 묶는다.
뜻밖에도 팔로워들은 리더의 강인함보다 부드러움을 더 원한다. 지성적이기 보다 감성적이기를 더 원한다. 신적(神的)이기 보다 인간적(人間的)이기를 더 원한다. 리더의 눈물이 그들의 원함을 채운다. 그러므로 지도자도 울 땐 울어야 한다. 눈물은 연약함의 증거가 아니다. 공동체성을 더 강화시키는 아주 좋은 명약이다.
요즘 우리 교회 안에도 전보다 눈물이 많아진 것 같아 감사하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교우들의 눈망울마다 감동과 치유와 회개의 눈물이 자주 맺힌다. 어떤 성도는 “예배당 의자에 티슈가 왜 있는지 몰랐었는데 이젠 알 것 같다” 하신다.
이는 나부터도 그러하다. 나 역시 왜 이렇게 요즘 눈물이 자주 나는지 모르겠다. 기도를 할라치면 성도들의 고단한 삶의 무게가 내 기도를 타고 흐른다. 말씀을 전할 때 역시도 그들의 눈앞에서 내 눈물 참는 일이 나의 새로운 숙제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예배의 찬양 곡조와 가사까지도 내 눈물을 마구 훔친다. 그래서 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울 땐 우는 게 좋겠다. 눈이 울어야 몸이 울지 않는다. 눈물은 우리의 복잡한 감정을 리셋(reset)시켜주는 창조주의 고마운 선물이며, 압력밥솥의 스팀분출이 밥솥의 폭발을 막듯 눈물은 마음의 폭발을 막는 진정제이다.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울어 똥구멍에 털이 날지라도 그게 좋은 거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 그래 그래 그게 좋겠다.
김종훈 목사/ 오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