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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내 인생인데-1

67년 전, 19501222, 흥남부두에는 여전히 배를 타지 못한 피난민 14000명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이미 유엔군은 모두 철수한 뒤였고, 뒤에는 중공군의 포격으로 불길이 치솟고 있다. 부두 앞 바다에는 기뢰가 가득했다. 이때 7600t급 메러디스 빅토리호 화물선 선장 레너드라루 선장은 부두의 피난민들을 탑승하기 시작했다. 화물칸은 물론, 덮개 없는 갑판까지 콩나물시루처럼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태웠다. 사나운 겨울 바다를 항해하여 무사히 남한으로 모두 다 탈출시켰다.


라루 선장은 피난민들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봤다고 회고한다. 그의 행동은 생명의 열매를 맺었다. 그 당시 화물선에 선원은 47명이었고 정상적으로는 추가로 12명 태울 공간에 화물칸과 갑판에 14000명을 태워 생명을 구했다. 그 작은 배에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이 다치지 않고 수많은 위험 속에서 그 일을 하였을까? “하나님이 직접 빅토리아호의 키를 잡고 있었다고 했다. 그 후 선장은 이 때 받은 감동의 영향으로 일생을 수도사로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수도원에 들어가서 평생을 14000명 평안을 위해 미국 뉴저지 주 뉴턴 수도원에서 기도와 노동으로 보냈다.


당시 선원 로버트러리(90)는 당시의 광경이 생생히 기억하고 있으며, 당시 14살 원동혁(81세 미국 오하이오주)씨는 선 채로 사흘을 버텨서 살아났다고 말하고, 당시 배에서 태어난 5명의 아기 중 이경필 씨는 거제도 장승포에서 동물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이때, 나의 아버지는 어린 나를 등에 업고 낡은 고깃배 한 척에 한 가족을 태워 자유의 땅을 향해 노를 저어서 바다 위에서 매서운 엄동설한 찬바람과 싸우며 사투를 거는 피난길에 드디어 북에서 탈출해 이 자리까지 오게 됐다. 소중한 나의 인생길에 어떻게 살아야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인가?


진선미의 단순한 의미보다도 뚜렷한 삶의 목적의식과 사명감을 갖고 살아온 날들을 보며 남은 나의 앞길을 주님께 맡기며 기도하게 된다. 어렴풋한 감상에 사로잡혀 공허한 시간낭비를 해서는 안 된다. 우선 내 앞에 닥친 가까운 손쉬운 것부터 전심전력을 다하여 새 국면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나는 주님을 붙잡고 최선을 다하였노라고 마지막 한마디 남길 수 있는 사람이 되면 거룩한 인생, 빛나는 인생이 될 것이다. 나 자신은 하나님의 것이다.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빛나는 인생이 되려면 깨()야 하고 깨()져야 한다. 죽어야()한다.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하고 죽는다면 참 인생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위해서 오셨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 같은 인생이 참의미를 갖는 것이다.


나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죽으러 온 줄 알아야 한다.

목회자는 복음전파를 위해서 죽어야 목회가 된다. 죽지 않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 한분 뿐이다. 내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아무 때나 죽어도 여한이 없다. 벌써 내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내가 사는 생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성실하게 대답하고 그 길을 가는 것이 신앙이다. 바울은 생애 목적이 나에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1:21)고 했다. 인생은 일방통행이다. 언제나 앞을 향해서 전진하는 것뿐이다. 지금의 인생길을 충분히 불태우며 적극적인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생의 시련과 고난에 대처할 내적자원을 주신다. 무거운 고통의 집, 재난과 폭풍 같은 문제들, 칠흙같이 어둡고, 길고 깊은 밤, 침몰하는 내 생애의 사건, 사라져 버린 찬란한 꿈, 이런 환란이 닥쳐와도 나의 주 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시며, 내 곁에서 나를 이끌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나 자동적으로 제사장 길을 걸어가는 예레미야는 극한의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특별히, 불의한 죄를 책망하고 죄의 비극적 결말을 선포하는 인생길을 가게 된다. 내가 가는 이 길은 전혀 내 의도가 아닌 주님의 뜻하신 길로 이끌어 가는 뜻밖의 길이요. 꿈에도 상상 못할 길을 가게 된 것을 볼 때, 내 인생은 주님의 섭리 속에서 움직여지고 있음을 고백했다. 야곱의 인생길도, 요셉의 인생길도, 모세의 인생길도 다 그리 했던 것이다.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 하니이다”(10:23)


인생 한 평생을 걸어가는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다. 아무리 장수를 염원해도 죽음이 오면 어쩔 수가 없다. 생의 장단(長短)은 인생의 노력이나 지혜에 좌우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인생이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있지만 베틀의 북(7:6)처럼, (103:15)처럼, 안개처럼(4:14) 잠시 보이다가 없어지는 존재이니 그 길이는 아무도 모른다. 미지에 속하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이다.

인생 방향 행로도 자기에게 있지 않다. 예레미야는 제사장 직무 길로 가고자 했으나 예언자 방향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요나 선지자는 욥바로 나아갔으나 기어이 니느웨로 갈 수밖에 없었고, 바울은 아시아를 방향으로 정하였으나, 끝내 마게도냐로 가야만 했다.


누가는 의사로서 안락과 존경의 삶 방향을 원했으나, 바울과 함께 선교의 고생길, 위험한 길을 가게 됐다. 나는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로, 선생님의 길을 원했으나 목사로, 부흥사로, 신학교 교수로 인생길을 가도록 주께서 인도하셨다. 인생길의 방향은 절대 주권자 하나님이 결정하시기 때문이다. 만사 협력으로 유익되게 하시는 하나님이 예정하심에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안락하게 살 것인가에 있지 않고, 유익한 길인가, 신앙적 합당한 것인가, 선한 것인가 에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평안하고 자기에게 이롭다 해도 그 방향이 결코 가치 있는 것이 아닐 때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뜻하신 바대로 이끌고 가시는 것이다. 비록 그 길이 고생과 손해보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할 때는 선한 가치 있는 길로 이끌어 가게 되는 것이다.

<계속>


고흥식 목사 / 영통영락교회

전 총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