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관점학파에 대한 개혁주의의 반격은 듀크대학에서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의 선도적인 연구자, 리처드 B. 헤이스와 E. P. 샌더스의 제자였던 가이 프렌티스 워터스에 의해 제기됐다. 워터스는 새 관점을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학자들이 포진된 학교에서 이 논의의 본질을 파악하면서 개혁주의 입장에서 종교개혁 전통의 ‘칭의관’이 여전히 성경적이라 주장했다.
워터스는 샌더스가 유대교를 순수 펠라기우스주의 종교로 그린 것을 수정했지만 결국 유대교가 반펠라기우스적임을 증명하게 됐다고 하면서 유대교의 랍비들의 견해는 논쟁의 여지없이 ‘신인협력설’이라 주장했다. 또 중세후기 구원론과 고대 유대교는 모두 반펠라기우스 체계이고 종교개혁자들이 이해한 바울이 옳다고 했다. 그러므로 새 관점의 구원론은 개신교가 아니라 로마가톨릭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워터스는 샌더스의 언약적 신율주의가 관련된 모든 초기(제2성전) 문헌에 공정하게 그리고 똑같이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바울이 유대교를 반대한 것은 그 경계표지(아이덴티 마커) 때문이었다고 했으나 바울이 접근한 제2성전 문헌들을 확실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또한 새 관점은 칭의를 구원론 교리가 아니라 교회론 교리로 잘못 해석해서 바울이 보지 못했던 곳에서 억지로 이분법을 강요한 것뿐이라 주장했다. 워터스는 개혁파 신학이 새 관점보다 얼마나 뛰어난지를 설명하면서 웨스터민스터 표준문서와 완전히 일치한 입장에서 새 관점의 구원론은 개신교가 아니라 로마 가톨릭과 가깝다고 비판했다.
워터스는 새 관점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는 부분도 있다고 했다. 즉 라이트가 그리스도의 주권이 기독교 신앙과 선포의 초점이라고 강조한 것에 대해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했고 또 라이트가 하나님의 백성에 이방인들을 종말적으로 포함하는 것이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의 중요한 관심사라고 지적한 것은 옳다고 했다.
새 관점에 대한 종교개혁주의의 대응을 갈라디아서의 이신칭의 교훈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이신칭의’는 바울의 이방선교의 산물이 아니라 바울복음의 필수적 내용으로 본다. ‘이싱칭의’의 메시지가 갈라디아서의 중심주제로 나타나고 있으며 바울 자신과 그 독자들의 특수한 역사적 정황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갈라디아서에만 한정되어 있는 특수한 역사적 정황의 산물인 것처럼 속단해서는 아니될 것이라 한다.
한국의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새 관점은 종교개혁의 근간을 흔드는 것으로 이해하고 다양한 비판을 하고 있다. 즉, 새 관점주의자들은 교개혁주의자들이 주장한 전가의 교리가 비성경적이라고 단정했는데 로마서 5장 12-19절에서 바울은 명백하게 한 사람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인한 의와 생명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가됐음을 밝히고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근거로 갈라디아서에 나타나 있는 칭의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은 성경본문체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새 관점이 아닌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이 더 정당하고 성경에 충실하다고 주장한다.
루터의 칭의 이해를 비판하는 새 관점의 칭의 개념은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의 기능을 외면시켰고 회개와 죄의 용서가 누락되어 있고 칭의의 교리를 개인주의를 피하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공동체적인 삶을 강조하기 위해 교리를 변형시켜 구원에 관련된 것을 교회론인 것으로 뒤틀어 놓았다고 하며, 또 새 관점학자들이 칭의 신학을 바울신학의 핵심으로부터 변방으로 몰아내어 주변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은 새 관점학자들의 중대한 결함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전통주의 관점에서는 기독교의 주요 관심사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혹은 구원받을 수 있느냐”는 수직적이고 실존적인 문제로만 생각하였으나, 새 관점에 의한 기독교의 주요 관심사는 “어떤 조건에서 이방인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어떻게 이방인 크리스천들과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수평적이고 공동체적 문제였다는 것을 알게 해 줬다.
새 관점주의자들은 전통주의자들이 충분한 역사적인 연구나 문헌의 검토 없이 바울 당대의 유대교를 획일적으로 ‘율법주의’로 단정해 버린 오류를 범한 것처럼 1세기 유대교가 획일적으로 ‘언약적 율법주의’로 단정해 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즉 새 관점은 바울 당대의 팔레스타인 유대교 일반의 경건과 신앙의 일부 면만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1세기 유대교는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었고 구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율법의 행위들을 준수해야 한다는 율법주의도 상존하고 있었다.
1세기 유대교가 언약적 신율주의에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나, 당시의 유대인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장로의 유전이나 율법의 의로 구원에 이르려고 했던 율법주의자들도 상당수 상존해 있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도 서기관들의 율법에 대한 해석(“장로들의 유전” 할라카)과 바리새인들의 행동규범으로 지키는 구두로 전승된 토라를 거부하셨다.
김종이 목사 / 성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