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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로의 결단

가정회복-14

우리는 알게 모르게 스스로를, 혹은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한다. 그 노력의 한 가지가 상대의 혈액형을 가지고 성향을 파악하려는 시도이다. 그것이 얼마나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A형은 이런 성격이고, O형은 저런 성격이라는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우리는 위로받기도 한다. 적어도 상대가 특정한 행동을 하는 배경에 혈액형이라는 이유가 있다는 점 때문에 그 사람이 좀 마음에 안 들어도 ‘그러려니’하고 넘기게 되기도 한다.


심리학에서도 사람들을 유형별로 분류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왔다. MBTI라든지 기질별, 성격별 구분 등 여러 가지 도구를 통해 사람들의 성향을 이해하고자 한다. 사람에 대한 구분이 이루어지면서 상대나 나 자신을 이해하고 용납하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지난 호에 소개한 분노 표출의 방식도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Harriet Lerner 박사가 구분한 5가지 분노 조절의 스타일은 내가 과연 어떻게 분노를 표현하고 조절하는가를 깨닫게 돕는다. 그러나 우리가 단순히 이해와 용납에만 머문다면, 건강하지 못한 감정표현의 패턴을 반복하고 살아갈 것이다.


나 자신의 상처, 분노의 뿌리를 알아가는데 노력을 쏟았다면 이제는 나의 패턴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C씨는 참 반듯하고 침착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신뢰를 주는 태도 덕분에 사람들이 따랐고 아주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는 교회에서도 꽤 중요한 역할들을 맡아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한 사람씩 관계를 단절하기 시작했다. 너무 친해서 일주일에 서너번을 보던 사람들과 더 이상 눈도 마주치지 않았고 인사도 받지 않았다.


문제는 C씨가 왜 화가 났는지, 무엇 때문에 마음이 상했는지 상대방이 도통 영문을 모른다는 것이다. Lerner 박사의 구분에 따르면 C씨는 거리두기형(distance)에 해당한다. 감정이 격해지거나 화나는 일에 생기면, 그 감정을 직면하고 해결하기 보다는 관계를 끝내버린다. C씨에게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은 한바탕 전쟁이 벌어짐을 의미했다. 이유도 모른 채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화를 내고 욕을 하던 아버지의 기분은 늘 예측불가였다. 별안간 터지는 지뢰밭 위를 걷듯 늘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어린 C씨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방어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게 숨어있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분노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 피해버리는 것만이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패턴이 어린 C씨에게 서바이벌의 기술이었을지는 몰라도, 더 이상 인간관계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겁에 질렸던 어린 C씨의 행동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성인이 된 C씨는 외롭고 괴팍한 모습으로 고정되어갔다. 자신을 그렇게 만든 아버지를 계속 원망하면서 성인이 된 자신에게 남아있는 것은 이제 스스로를 파괴시키는 쓴 뿌리일 뿐이었다.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행동양식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조금 친해졌다가도 다시는 그 사람의 얼굴조차 안 보고 사는 인간관계 패턴에 계속 머무는 것이다. 자신만 외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속한 공동체 역시 아프게 하는 가시를 지니게 된다.


사람이 변하기는 정말 어렵다고들 한다. 아주 작은 변화도 참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인지 평소와 조금만 다른 행동을 보여도 주위에서는 뭘 잘못 먹었냐는 둥,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는 둥, 뭐 바라는 게 있냐는 둥 떠보기 마련이다. 계속 지속되던 행동패턴에 순간적인 변화를 보이면 주변에 서는 이내 불신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주위의 의심스러운 시선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내가 반복해왔던 부정적 행동을 긍정적으로 바꾸고자 할 때는 나 자신도, 주위 사람들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른다. 변화에는 저항이 따른다. 긍정적인 변화든, 부정적인 변화든 현재의 상태를 지속하고자 하는 모두의 본능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나 현재의 상태가 자꾸만 내 삶에서 문제를 일으킨다면, 행복하지않다면,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프게 한다면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제는 변명이 아닌 변화의 때가 아닌지 아주 사람이 완전히 통째로 바뀌는 큰 변화일 필요는 없다. 내가 화가 나서 말이 하기 싫은 사람을 갑자기 뜨겁게 사랑하고 모든 것을 다 내어주라고 한다면 하늘의 별따기처럼 느껴져 그냥 포기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눈을 맞추고 인사하는 정도는 조만간 시도해 볼 수도 있는 작은 변화일수 있다. 화가 나서 상대를 몰아치고 따져야 직성이 풀리는 패턴에서 한발자국만 물러나 하루 이틀 기도의 시간을 갖는 것은 해볼 만한 일일지도 모른다. 화가 나면 피하고 아프고 아무 것도 못하는 무기력감에 빠져 지냈다면 오늘은 일어나 창문을 열고 친구에게 전화를 하는 것을 시도해 볼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이 짜증나고 불안해서 내가 다 해버려야 안심이 되었다면,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내 일 한 가지만 부탁하고 맡겨 볼 수도 있는 일이다. 내 극단적인 행동이 더 이상 효과적이지 않다면, 이제는 방향을 틀어 걸어야 할 때이다. 느리지만 긍정적인 방향을 잘 잡고 한 걸음씩 걷는 것으로 충분하다. 정말 좋은 소식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선언하셨다는 것이다(고후 5:17).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결론 내셨다. 우리는 우리 안에 이미 주어진 변화를 하루하루 살아내기만 하면 되는 지도 모르겠다. 이미 하나님께서 그일을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심연희 사모 / RTP지구촌교회(미주) Life Plus Family Center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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