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70평생 ‘큰 집’을 내 집처럼

한명국 목사의 회상록

첫 번째 재판이 끝나니 독방에서 합방으로 옮겨졌다. 74310일 처음 독방에 들어왔을 때 고독감에다 환멸을 느껴 누구와 말 할 사람을 찾아봤다. 건너편의 죄수들과 통방도 시도했으나 경비가 삼엄해 여의치 않았다. 사람인()자는 막대기 두 개가 서로 기대어 있는 것으로 사람은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대화하는 사회적 동물(social animal)임을 독방신세에서 절감했던 터였으나 4개월간 독방과 합방 4개월간 성경을 17독하고 50여권의 책을 읽고 9사 상하층 건물 200명의 수감자들에게 전도하고 기도하며 묵상하다보니 오히려 독방생활이 매우 친숙해졌다.


그런데 첫 번 재판이 끝나자 한 평도 안되는 방에 합방해 들어가니 먼저 들어온 5명 중 감방장길봉수 씨는 감방규율인 안철용 씨와 의논해 나의 자리를 마련해주고 좌상이라 불렀다. 나는 좌상이 무엇인지 모른 채 6명이 첫날을 지내는데 당시엔 긴급조치 아래 많은 죄수가 들어와서 용신하기조차 어렵고 밤에는 새우잠이나 앉아서 자는 형편이 되니 오히려 외로웠지만 독방생활이 당장 그리워졌다. 온갖 종류의 죄수들이 한 방에 모였고 무더운 여름 고약한 땀 냄새, 코고는 소리, 몸부림, 잠꼬대, 이를 가는 소리, 방귀냄새, 감방구석의 플라스틱 오물통으로부터 나는 썩은 냄새와 가끔 설사 똥 구린내는 도저히 잠을 잘 수 없게 했다.


옛 노인들 말에 내 손자놈 방귀냄새는 깨처럼 고소하다고 했는데 독방에 있을 땐 나의 오줌똥이나 가끔 설사를 해도 냄새가 별로 안났는데 다른 사람의 몸 냄새와 똥냄새와 찌린내는 얼마나 지독한지 냄새에 둔감한 나의 코를 견딜 수 없게 했다. 나는 몇 가지 들은 말이 떠올랐다. “구린내도 자기 것은 냄새 없고 남의 것은 지독하다. 못 나도 제 새끼는 귀엽고 헐값으로 사도 제 물건은 다 좋다. 시어머니에게는 미운 며느리의 계란 같이 이쁜 발 뒤꿈치도 꼴불견이라 했다. 팔이 안으로 굽듯이 남은 나쁘고 자기는 좋고 옳다하는 세상이다.” 그래서 공자 같은 성인도 이즉호야(利則好也)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좋다고 해석한 부친의 말씀이 생각났다. 나는 이심(二審) 고법판결에서 풀려 나올 때까지 8개월 동안 있었던 수많은 죄수들의 얘기와 수다 가운데 감방장의 도둑질을 소개하고 뒤늦게나마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간증하고자 한다.


길봉수 씨는 도둑질 도우미를 데리고 종로거리를 두리번거리며 다니다가 그날은 2층에 있는 병원을 털기로 점찍고 환자처럼 가장해 병원 내부를 여러 번 관찰했다. 영하의 추운 날 그는 아래에서 망을 보는 도둑 곧 교도소에서 만난 자에게 신호를 보내고 옥상에서 줄을 타고 병원 창문 앞에 내려와 준비한 물걸레를 유리창에 붙이고 한참이나 기다렸다. ‘톡톡두드리니 물걸레가 유리와 함께 얼어붙어서 소리 없이 잘 깨졌다. 손을 안으로 넣어 잠금 쇠를 풀고 창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의료 기구를 차례차례로 정돈한대로 잘 묶어서 갖고 들어간 큰 망태 속에 넣고 자기가 지붕에서 타고 온 줄에 매달아 아래서 망보는 도둑에게 내려 보냈다.


두 도둑은 이 물건을 파는 것이 문제라며 의논하다 길봉수는 장물아비를 찾아 팔기로 하고 수소문해 40여 년 전 돈으로 50만원(당시 교사 월급은 약 3만원 정도)에 팔았다. 그 중에 40만원을 감추고 겨우 10만원 밖에 못 받았으니 똑같이 나누자고 속였다. 망본 도둑은 위험을 무릅쓰고 형님이 수고해서 팔았으니 6만원하고 나는 4만원만 받아도 너무 좋다고 해서 그렇게 했다. 감방장은 자기 몫 46만원의 거금을 서울 무교동 거리와 인천으로 두루 다니며 환락과 못된 짓으로 몇 달 만에 모두 탕진하고 말았다.

어느 날 도둑질에 실패하고 이른 아침 모자를 눌러쓰고 운동화를 신고 남대문 거리를 지나는데 리어카 장사꾼을 스쳐지나가다가 뒤돌아서 몇 걸음 와보니 바로 망 봐준 친구 도둑이었다. “좋은 일이 생겼으니 한 건만 같이 하자고 꼬셨으나 그는 이미 손을 씻었고 그때 동업해서 받은 4만원으로 리어카 장사로 새 출발했으니 다른 친구를 찾아보라고 하면서 딱 거절했다.


한 건만 잘하면 몇 달씩 팔자 좋게 지내는데 노동판에 가서 죽어라고 일해도 먹고 살기 힘들고 배운 지식도 기술도 없는데다 배운 것이라고는 도둑질이니 계속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고 소위 도둑들끼리 하는 말로 ’(범죄전과)5개 곧 군대의 용어로 원수이니 노동판에도 잘 받아주지 않아 손을 씻고 새 출발한다는 것이 정말 어려웠다고 실토했다. 추운 겨울이 되면 갈 곳이 없어 할 수 없이 3개월형을 받을 만한 들치기, 날치기, 폭치기놓아둔 물건을 들고 가기, 잽사게 들고 달아나기, 폭력으로 빼앗아 뛰기로 구치소에 들어와 공짜 집에 공짜 밥먹고 봄이 되면 출감한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20회나 해서 큰집에 들어온 60세나 되는 잘 알려진 좀 도둑을 보기도 했다. ‘감방규율인 안철용도 남대문 시장에서 종이 줍는 양아치인데 겨울에는 먹고 살기가 어렵고 추울 때는 경범죄를 지어 큰집’(구치소)생활이 훨씬 낫다고 맞장구를 쳤다.


수년 후 어떻게 알았는지 부산의 사직중앙교회로 감방장 김봉수 씨가 찾아왔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제주도에서 억울하게 죽을 고생을 했는데 치료비라도 도와 달라 해서 약값치료에 보신탕 대접에 여비와 성경책을 전달하면서 우리가 서대문구치소에서 매 주일마다 감방에서 설교할 때 회개하여 손 씻고 강생이(담배)끊고 새 출발을 하겠다던 것을 다시 상기시키면서 간절히 기도한 후 보냈다. 한번은 그가 병원에 입원했다고 해서 심방하고 치료비를 지불했다.


길봉수 씨가 나에게 한 고백은 다음과 같다.

6·25전쟁 때 그는 버리운 고아였다. 고아원에서 지낸 기억이 있는데 길에서 주운 아이라서 원장은 자기의 성은 ”, 이름은 주워온 사람의 이름을 따서 길봉수라고 했다. 배가 고파서 몰래 길거리에 나가서 음식구걸도 하다가 살짝 살짝 물건을 훔치는 좀도둑질을 하다가 고아원을 탈출하여 대장이 시킨 대로 돈도 도둑질하고 차츰 대장의 눈을 속여 삥땅한 돈을 바위 밑에나 숲속에 숨겨두고 좀도둑에서 도둑놈이 되어 감방신세로 청소년범에서 큰 도둑이 되고 배운 것은 도둑질이고 노동판에도 전과 별이 너무 많아 받아주지 않으니 교도소를 안방 드나들 듯 살아온 한평생이라 했다.


그 후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서울교회에 부임한 후에도 또 찾아와서 도와 달라기에 신앙생활로 자업자득을 독려하고 주머니를 털어 도와주고 계속 올 때마다 도와주다가 기도하고 직장과 기도원도 소개해 줬는데 오고 또 오더니 한번은 4부 예배 찬양대원이 의자에 놓고 연습실로 간 동안 그 가방을 훔쳐 달아나는 것을 본 사무장 최 집사가 뒤쫓아 갔으나 못 붙잡았다. 그래도 옛날 감방장의 인연에다 고귀한 영혼을 생각해서 돈 달라고 올 때마다 그렇게 옥중 친구요, 감방장 대우로 늘 도와줬는데 성가대원 손가방을 훔쳐간 후로는 아주 괘씸하기 비길 데 없었다.


그런데 한번은 내가 준 성경을 많이 읽고 정말 신앙생활로 새 출발을 했다면서 앞으론 다시 목사님을 찾아와 괴롭히지 않겠다고 정색을 하며 굳은 결심을 하기에 돈도 주고 간절히 기도해 주고 보내면서 몸은 이미 병들었고 70에 가까운 인생 말년에나마 60년간 도둑에서 도적(盜賊)질로 교도소와 구치소를 내 집으로 살아온 뒷모습이 십자가상의 예수님의 오른편 강도처럼 불쌍하게 느껴졌으나 길봉수 씨는 정중하게 굽혀 인사하고 아주 당당하게 새 출발을 다짐한 그의 뒷모습을 새기며 나는 눈시울을 적셨다.


그는 정말 다시 찾아오지 않았고 늦어도 너무 늦은회개였으나 지금쯤은 천국에서 서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주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린다. 한영혼의 구령에 투자한 노력과 시간과 돈으로 귀한 영혼은 구원받았으니 35년 교도소 선교와 선교회장으로 봉사해오면서 제일 기억에 남는 사람으로 여긴다.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4:28)


한명국 목사

BWA전 부총재

예사랑교회 담임



총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