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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와 종교개혁을 제대로 알기위한 책 -2

목회하며 책 읽으며-33

3. 고난은 용기를 낳고 연대를 가져온다.

유럽 변방 나라 독일, 독일지역에서도 변두리 성당 한 젊은 수사, 아주 작은 돌멩이를 던짐으로 종교개혁의 거대한 풍랑을 일으킨 원인을 제공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당에 면죄부를 붙일 때 단지 상위 로마 가톨릭 신부(주교, 주임신부)와 대화를 통해 성서에서 면죄부의 근거출처와 활용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높은 자리에 있는(나중에는 이탈리아 로마 교황까지 나서서) 분들은 대화보다 무시전략을 사용했다. 권위로 찍어 누르려는 전략을 사용했다.


면죄부와 팔레스타인 땅 십자군전쟁에서 탈취한 신앙 성인(?)들의 뼛조각들을 전시하여 거두어들인 막대한 돈을 독일에서 교회와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로마의 성당을 건축하는 곳에 사용함으로 독일의 영주들에게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가했다. 그래서 로마교황청에 반감이 시작됐고 독일 지역 영주와 농민들은 르네상스로 개화된 생각의 이념적 논리를 루터가 공개한 면죄부반박문에서 찾았다. 유럽종교의 중심지 이탈리아, 프랑스, 로마와 어떤 싸움을 하고 싶은데 논리적으로 명분이 서지 않는 상황에서 루터는 강력한 대응논리를 제공했으며, 인쇄술의 급격한 발달은 루터의 개혁내용들을 문맹인들을 위해(그림) 판화로 제작되어 대중들에게까지도 분명하게 의미를 전달했고, 루터의 글들은 종교개혁 전사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또한 스위스, 프랑스, 독일의 다른 지역 개혁자들에게 힘과 용기를 제공했다. 그래서 종교개혁은 독일을 중심으로 폭발적 힘을 발휘했고 로마교황의 부실한 대응은 젊은 한 수사를 종교개혁의 영웅으로 떠올렸다.

 

4. 새로운 시대, 혁신적 예배, 혁신적 변화

루터는 평생 신, 구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종교개혁이 한 시대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수백 년 전 유럽을 강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성서의 자국(독일)어 번역 때문이다. 그래서 성서를 누구나 글자를 알면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이 결과로 이후 구교와 다른 프로테스탄트(신교)의 새로운 형태의 예배를 만들어냈다. 내용도 중요하지만 형식도 필요했다. 새로운 성서해석에 더 적합한 교회구조의 개혁은 많은 성당과 수도원의 수사, 신부, 수녀들이 독일 루터교회를 만드는데 공헌하도록 했다. 이때 혼란도 많았다. 그러나 오직 성서만을 기초로 다른 많은 구교의 전통을 파괴했고 성서를 기초로 새로운 형식과 신학을 개척했다. 새로운 예배 전통은 새로운 음악을 요구했고, 예전중심의 예배가 말씀중심예배로 변화하는데 루터의 지침은 커다란 공헌을 했다. 개혁은 홀로 할 수 없다. 루터를 지지하는 영주, 제후, 신부, 농민들과의 연대는 시간도 필요했고, 인내와 설득도 필요했다. 불가피한 전쟁과 혼란도 어쩔 수 없이 있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외 다른 개혁적 노선을 가진 내부의 적들도 생겼다.


현재 한국개신교회는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 로마 가톨릭보다 더 부패하고 타락했다고 전문가들은 이야기한다. 로마 가톨릭도 반()종교개혁이라고 나름 지난 500년 많은 개혁을 했고 오히려 현재는 새로운(아르헨티나 출신 프란체스코 급진) 개혁교황의 출현으로 개신교보다 더 인기를 누리고 있다. 개혁은 성서의 본질추구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루터보다 150년 전에 성서중심의 개혁을 추구하다 화영에 처한 영국출신 선임개혁자 존 위클리프가 있었다. 한국개신교회는 정신적으로 종교개혁자 루터의 후손들이다. 그 후손의 역할을 잘하려면 성서중심의 삶에 진일보해야하고 다른 모든 것은 철폐해야한다. 버리지 않으면 결코 개혁은 얻을 수가 없다. 그리고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죄와 구원을 어떻게 해석하고 삶으로 체험하게 할 것인지 집중, 집중해야 한다.


조성배 목사 / 반석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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