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는 고종(高宗)의 정비(正妃)이며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어머니이다. 명성황후는 아버지 여성부원군 민치록과 어머니 한산 부부인 이씨의 소생으로서 아명(兒名)은 아영(또는 자영)이다. ‘민비(閔妃)’는 일본인들이 황후를 비하해서 만든 호칭이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고, 숙종(肅宗)의 모친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와 혼돈하지 말아야 한다.
민아영은 열네 살 때인 1866년 신정왕후 주씨와 흥선대원군에게 고종의 왕비로 간택되어 명성황후가 됐다. 처음에 화기애애하게 시작된 대원군과 민아영의 관계는 황후가 낳은 왕자가 대원군이 지어 보낸 탕약을 복용한 후에 급사한 사건 이후에 급격이 나빠져서 정적이 됐다. 명성황후는 감히 흥선대원군의 권위에 도전해서 결국 그를 권좌에서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1882년에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과도하게 지원하다가 훈련도감에서 월급도 받지 못하고 천대 받다가 해고된 군인들이 군란(壬午軍亂)을 일으키자 장호원으로 피신하면서 권력을 상실하고 대원군이 복귀해서 민씨 일가의 세력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명성황후는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해서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하고 다시 권력에 복귀해서 1884년 12월 4일,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사흘 만에 제압하고 장기집권 체제를 굳혔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중국을 이긴 일본은 반일 친 중국, 친 러시아 정책을 펴는 명성황후를 그냥 둘 리 없었다. 일본은 1895년 10월 8일에 낭인 오카모토 류노스케에게 일본 군대와 경찰과 그들이 훈련시킨 조선군을 앞세워 경복궁에 침입해서 황후를 살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오카모토는 경복궁 수비대장 홍계훈을 쳐 죽이고 팔을 벌여 황후를 보호하는 경호대장 이경직의 두 팔을 자르고 황후를 땅에 쓰러뜨려 짓밟고 칼로 난자해서 살해하고 시체를 홑이불에 말아서 솔밭으로 가져가 석유로 불태웠다. 한 나라의 황후를 땅에 쓰러뜨려 짓밟고 장도로 난자해 살해하다니 이 얼마나 극악무도한 만행인가.
역사는 이 비극을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기록했다. 을미사변은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지휘 아래 일본군 한성 수비대장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가 고용한 사무라이들의 소행으로 기록됐다(위키 백과).
일본은 조선 팔도의 농산물과 목재와 종자(種子) 등 자원을 모조리 빼앗아가고, 그것도 모자라서 조선인의 정기를 말살한다면서 산 준령마다 쇠말뚝을 박는 파렴치한 행위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만행에 대해서 일본이 전후 독일처럼 반성하고 사죄한다면 치욕스런 과거를 왜 다시 거론하랴만 대부분의 정치 지도자들은 반성은커녕 대동아전쟁의 향수에 젖어있는 것 같다. 부끄러운 역사이지만 잊어서는 안 되겠다. 기억하고 있는 한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