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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흙사랑


아스팔트 거리를 걷는 도시민은 무척이나 흙 밟기를 좋아한다. 문경새재 제일관문에서 마지막 관문까지는 아스팔트가 아닌 순 흙길이다. 도시민이 와서 맨발로 걷는 것을 보면 흙을 무척 그리워하는 모습이 보인다. 왜 사람들은 흙을 동경하는가!


도시 직장에서 은퇴하고 귀촌하는 사람들의 얇은 소망은 텃밭에 채소를 심고 호미로 땅을 뒤져보는 것이었다. 손으로 흙을 만져보고 코로 흙냄새도 맡는다. “산골농부의 자연밥상의 저자 자우님의 흙과 더불어 사는 즐거움이란 글이 있기에 여기 실어본다.

 

그대로의 자연 그리고 건강한 삶

자연에 온전히 몸을 맡기고 산골농부로 살아가는 동안 심성도 변하고 관상도 변한 것을 보면 흙밭과 더불어 마음밭도 적잖이 일궈진 모양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변화는 남의 일인 줄만 알았던 건강한 삶이 지금 여기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펼쳐진다는 것이다


이렇듯 나를 송두리째 뒤바꿔놓은 것은 다름 아닌 자연에 중심을 둔 농사다. 산골농사는 땅을 갈지 않고, 두둑도 만들지 않고, 화학비료와 농약, 거름 등 인위적으로 만든 자재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농사가 되는지 의아하게 여길 텐데 아주 쉽고 단순한 원리다. 땅을 갈지 않는 무경운자연 절기에 맞는 농사는 농사를 지을수록 땅이 살아나고, 땅에 뿌리 내린 작물과 그 곳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사람 모두가 건강해진다.

 

본질에 충실할 때, 진정한 아름다움

가을걷이가 끝나갈 무렵, 밭 전체가 뿌려놓은 보리는 손가락 길이만큼 자라서 첫눈을 맞이했다. 보리가 자라는 동안 흙속으로 번져나간 뿌리는 미생물을 활성화시켜 땅을 기름지게 만들고, 자생초가 싹이 틀 기회를 차단해준다. 당연히 다음 작물이 살아가기 좋은 환경이 조성된다


이러니 눈 이불을 덮고 있는 보리는 그렇게 살가울 수가 없다. 이른 봄이면 파릇한 순을 뜯어서 나물을 무치고, 이삭이 팰 때면 그림 같이 풍경에 마음을 뺏겨도 그만이다. 여느 작물과 마찬가지로 보리도 사람을 위해서 결실을 맺는 것은 아니다. 단지 본연의 삶에 충실했을 뿐인데 결과는 땅심을 키워주고, 농부에게는 풍성한 먹을거리를 안겨주며 더불어 사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사람살이와 비교해보면 하나도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나 한 사람 바로 사는 것이 가족, 이웃, 사회를 아름답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흙과 친하는 과정에서 인생철학 한 토막을 토로하고 있다. 자기 삶에 충실하는 것이 남을 돕는 것이라고. 옛적에 밖에서 놀던 아이들도 부모 모르게 흙을 먹더라니까. 어른들에게 들키는 날에 혼이 나면 서로 먹는 거야, 왜 먹느냐고 물으면 맛이 있다.


또 옛적 이야기가 있다. 손발에 상처를 입어 피라도 나오면 어른들은 흙가루를 발라주면서 후후, 흙이 네 조상이다하는데 묘하게도 지혈이 된더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은 왜 이렇게 흙을 동경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 이유를 안다. 그리스도인들은 흙신학(Soil Theology)의 소유자다. 성경에서 그 답을 찾은 것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2:7)


불교에서는 몸이 물, , 공기, 흙 네 요소로 이뤄졌다고 한다. 인간의 존재는 반야심경에 나오는 오온 즉 색수상행식으로 된 존재라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결코 그렇지 않다. 사람의 원자료는 흙이다. 흙은 사람 구성의 원자료이다


그러나 깨어진 그 부분이 흙이 메워줄 것 아니냐는 것. 의학적인 해석을 차지하고라도 명백한 성경의 설명은 흙으로 빚어진 사람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흙을 동경하고 흙을 사랑하게 됐다는 현실을 근원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은가!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일단 돌아간다. 부활의 문제는 나중의 사건이다.

水流(수류) 권혁봉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