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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적인 관점에서 본 갈라디아서의 구원론-22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중심성이 구원의 역사, 하나님의 약속들의 성취와 밀접하게 연결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슈나이더는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조직신학 및 후대의 삼위일체신학으로 빠져드는 것이라는 반대가 있을 수 있으나 오히려 신약성경 자체를 귀납적으로 연구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신약신학의 토대이자 중심이라는 것이 드러난다고 한다.
슈라이너는 신약신학이 하나님께 집중되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며, 성령으로 충만한 신학이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역은 구원역사의 시간표를 따라 진행한다고 한다. 즉 하나님의 약속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성취됐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은 하나님의 약속들이 성취되는 토대임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성령의 사역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들을 성취하기 시작하셨다는 중요한 표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신구약을 통합해 이해하는 구약학자 브레바드 차일즈(Brevard S. Childs)는 「구약과 신약의 성경신학」에서 구약과 신약 사이의 연속 또는 불연속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어떤 접근도 거부한다고 하면서 신구약을 통합하여 이해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갈라디아서의 구원론을 기독론 중심으로만 이해했던 전통주의와 새 관점주의자들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신론적인 하나님 중심의 관점으로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구원론의 초점을 인간에서 출발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경륜,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에서 시작할 때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통치)에 대한 강조가 복원돼야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를 강조한 나머지 신약과 구약과의 관계성에 있어 불연속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보다는 연속성을 강조함으로써 기독론뿐 아니라 신론에도 비중을 두어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입장에서의 구원론과 새 관점주의자들의 입장에서의 갈라디아서의 구원론을 비교 연구하면서 성경이 말하는 구원론은 어느 교파의 교리나 어느 신학자의 한 가지 관점으로는 제대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오히려 종합적이고 통전적인 입장에서 고찰할 때 갈라디아서가 말하고 있는 구원관을 잘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을 얻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의 구원론을 신론, 기독론, 성령론의 관점에서 통합적으로 보아야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 증언하려고 했던 구원론을 입체적으로 잘 설명할 수 있다.
전통주의나 새 관점의 구원론에 대해 연구할수록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구원론을 어느 교단의 교리나 신학자의 관점으로는 다 담을 수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만약에 한 가지의 관점만 가지고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론의 전부라고 규정한다면 엄청난 오해와 실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역사를 통해 증명됐다.
오히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중심에서 종합적인 관점에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구원론을 있는 그대로 전해주고 삶으로 살게 해야 된다고 본다.


성령론에 관해서도 전통주의 입장이나 오순절 계통에서는 구원과는 상관없이 구원받은 이후의 은사나 능력의 관점에서만 강조됐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론적인 관점에서 구원론을 생각해야 된다고 본다.
특히 침례신학대학교 장동수의 “갈라디아서의 성령론”을 읽고 나서 구원에 있어 성령의 역사가 필수 조건임을 더욱 느끼게 됐다. 갈라디아서의 구원론이 전통주의 입장에서 항상 ‘이신칭의’의 관점, 즉 율법의 행위와 대조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거나 구원받는다는 측면만이 강조되는 서신으로만 이해돼 왔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13절에 강조점을 두고 이해함으로 기독론적인 관점에서만 보아왔다. 따라서 갈라디아서 3장부터 6장의 논의의 핵심에 서 있는 성령론에 대한 강조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라이트 풋(J. B. Lightfoot)은 갈라디아서의 5장 25절에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Eij zw'men pneuvmati, pneuvmati kai; stoicw'men)라는 말씀은 “실제 생활이 아니라 이상적인 삶”을 의미한다고 해석함으로 성령으로 말미암는 삶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피했다.
바렛(Barrett)은 갈라디아서 3장 1~5절에서 성령에 대해 바울이 말하는 것은 “잠시 곁길로 간 것”이라고 언급했다.


베츠(Hans Dieter Betz)도 갈라디아서 3장 2절에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to; pneu'ma ejlavbete)라는 말씀에서 갈라디아인들이 지금 막 율법 아래 영향을 받은 것을 고려하면 그들이 바울의 율법 밖에 있었던 그리스도 복음을 선포한 것을 들은 초기에 성령 받은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단지 “열광주의자 혹은 황홀경의 경험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동시에 갈라디아서 6장 1절의 “신령한 자들”(oiJ pneumatikoi;)이라는 어휘는 그러한 자들을 의미하는 전문용어로 보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 갈라디아서의 후반부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성령의 구원 사역’에 초점을 맞추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예를 들자면 피, 럴, 코스그레이브, 러셀, 렌드 등이다. 


특히 그 중에 피는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이 주된 역할을 하고 있고 바울은 자신이 체험하고 이해하는 영안의 삶이 어떤 모습인지 그 실상을 더 완전한 형태로 그려 보인다고 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능력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임재이신 성령을 통해 시작하고, 계속 이어지며, 마지막 날 그 결말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또한 바울 서신의 성령을 “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로 명명하고 갈라디아서의 성령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표지(identity marker)로 본다. 럴(Lull)도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경이적인 경험과 새로운 생명의 시작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과 관련된 성령에 관해 말했고 또한 바울은 육체와 모세의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와 관련된 성령을 말했다”고 하면서 갈라디아서 안에서의 성령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종이 목사 성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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