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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불편하면 아주 편하다

하늘 붓 가는대로 - 94

살아갈수록 좀 불편한 것이 아주 편하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게 되고 이 사실을 타인들에게 일종의 진리나 되는 것처럼 말해 주고 싶었다. 우리의 생활에 불편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못 가졌기에 불편하기보다는 가졌기에 더 불편하다는 것이다. 어느 스님이 말했던가. 그건 누가 말했던 상관없다. 무엇을 가졌기에 부자(富者)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안 가졌기에 부자가 된다는 것인데 듣기에 따라 알쏭달쏭하다. 그러나 성경이 이 말의 의미를 명료하게 밝히고 있다.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
그렇다. 풍부한 소유보다 풍성한 자기가 돼야 하는 것이겠다. 법정 스님의 말이다. 또 이런 말의 정확한 해명은 성경이 말하고 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나에게는 우선 스마트폰이 없다. 스마트폰의 소유자는 아내 할멈이다. 이 스마트폰에는 온갖 세상 잡담 잡상 잡념들이 밤낮없이 들어오는데 할멈은 거기 응하느라 꽤나 신경을 쓰는 것 같다. “카톡”이라는 소리가 밤중에 들려오면 거의 경기가 일어날 정도로 놀란다. 나에게 꼭 필요한 메시지는 할멈의 스마트폰으로 오는데 그 땐 할멈이 통고해 주니 나는 뒤늦게 아내 할멈 비서를 둔 셈이 됐다.


나는 일찍부터 자가용 없이 지금까지 살고 있다. 세상에 자가용 없는 것도 일종의 행복이라고 말하는 동료들도 있다. 어쩌다가 접촉사고가 나면 골칫덩이란다. 하긴 내가 워낙 기계충이라 운전에 자신이 없어서 자가용을 못 가진 것인지 안 가진 것인지 모른다. 또 서울 도심에서는 자가용 을 지닌 자도 사용 못하고 있는 판이다. 내가 저 시골 산골에 살고 있다면 꼭 차를 가져을 것이렸다. 승용차가 없는 것이 약간 좀 불편해도 사실은 아주 편리하고 유익할 때가 많다. 어느 교회의 초청을 받을 경우 초청자는 이미 나를 알고 승용차를 보내주는 등 교통 편리를 제공하는데, 이 때 저들은 나에게 예우를 한다. 나는 예우를 받는다. 좀 얄미운 변명일지 모르지만 남에게 예우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도 베품의 한 모양이다.


추운 겨울 버스 정류장에서 9번 버스를 기다린다. 9번 버스는 구리에서 강변 가는 버스이다. 그 외에도 강변행 버스가 많지만 9번이 바로 나의 아파트 입구에 있으니까 주로 애용한다. 버스를 기다린다. 곧 오겠지? 이때가 기대 소망의 순간이다! 저 멀리서 9번 버스가 온다. 이때는 기쁘다! 자가용 나의 버스가 오는도다! 마침내 정류장에 왔다. 나는 교통카드를 찍고 좌정한다. 기분이 좋다. 자가용에서는 이런 기쁨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전철 탈 때는 더 흥분된다. 경로석에 같이 앉은 영감 할멈에게 나이도 묻고 자식농사도 묻고 건강도 묻고……. 일제 강점 이야기, 6·25전쟁 이야기, 보릿고개 이야기, 민주화 이야기 등. 내릴 때까지 화기애애, 승용차 안에서야 누구와 이런 대화가 있겠는가?


내릴 때 쯤 되어 폭탄 질문이 발사된다. 단도직입적인 폭탄이다.
“댁은 어느 교회에 다닙니까?” 우물쭈물하는 상대에게 “나는 그대가 어차피 교인인줄 알았습니다”한다. 상대들이 말한다.
“왜 내가 교회 다니는 교인 같아 보입니까?” “나는 다니지 않는데요.” “예, 교인입니다.” 어떤 반응이건 간에 나의 폭탄선언 일괄(一括)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
따로 전도할 시간 낼 필요가 없다. 전철이 멈춘다. 내 갈 길 따라 나는 내린다. 살아갈수록 버리기를 잘하자.

없는 것이 편하다. 없는 것이 약간의 불편을 주되 결국은 아주 편함을 준다.


水流(수류) 권혁봉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