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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과의 실전 : 그리스도의 신성으로 급소를 공격하라-6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진리를 말씀으로 증명하라)
방ㅇ은수 목사의 신학의 변

3) Peleh Yo'etz(Wonder of a Counselor, 책사‘모사’의 불가사의‘경이’)라는 호칭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사9:6의 속에는 성령을 암시하는 “Peleh Yo'etz”라는 호칭이 들어 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성령은 구약에는 주로 “하나님의 영” 또는 “야웨의 영”으로 표현돼 있고 신약에는 주로 “성령” 또는 “하나님의 영” 또는 단지 “to pneuma”라고 표현돼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성령을 보혜사(Parakleetos)라고 부르신 것이 요한복음에 기록돼 있는데 이 Parakleetos가 영어로는 Comforter 또는 Counselor라고 번역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별히 사11:2에서는 성령을 “야웨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야웨를 경외하는 영”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모략과 재능의 영”이라는 이 말씀 속의 “모략”은 바로 Etzah(counsel)로서 사9:6의 Yo'etz(couselor)와 함께 yaa'atz(advise, counsel)에서 파생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Peleh Yo'etz라는 칭호가 성령과 관련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요한복음 14~16장에 기록된 바 성령에 대한 주님의 가르치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요14:16에서는 “그가”(아버지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라고 하신 것에 반해 15장 26절에서는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처럼 성령 하나님을 파송하실 수 있는 위치에 있으실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보혜사를 “주시는” 것이 바로 자신이 보혜사를 “파송하시는” 것이며 따라서 자기와 아버지가 “동등한” 위치에 계심을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파송하시려면 적어도 성령과 “동등한” 위치에 계셔야 한다. 낮은 자가 높은 자를 파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16:7에는 “가면 내가 그를(보혜사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하심으로써 다시 한 번 “자신이” 보내실 것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15장 26절에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성령께서 단지 피동적으로 보냄 받으시는 것에 그치지 않으시고 자의로, 자기 주도권으로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런 말씀들은 3위 하나님의 완벽한 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탄생도 성령에 의해 “잉태 되셨고”(마1:18), 성령이 “충만하셨고”(눅4:1), 성령의 “권능으로” 사역을 하셨고(눅4:14), 아버지께서 성령을 아들에게 “한량 없이 주셨고”(요3:34), 성령으로 “기뻐하셨고”(눅10:21), 성령에 의해 “부활하셨다.”(롬1:4) 그러므로 성령의 모든 “놀라운 역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났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이사야가 예언한 “책사(상담역)의 불가사의(경이)”이셨던 것이다.  물론 구약에는 이 구절 외에도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구절들이 더 있다.(미5:2, 단7:13,14,27 등)


4)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호칭과 그리스도의 신성
“Mighty God”는 우리말로 “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번역해야 옳고 만일 이것을 우리말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번역해야 한다면 영어로도 “Almighty God”라고 해야 옳지 않겠는가 하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특별히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들이 요한복음 1장 1절을 가지고 장난하듯이 이것을 가지고도 “대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번역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문제는 아버지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성자 하나님은 전능하지 못한 단지 “대능한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두 신이 존재하는 것이 되는 것이어서 다신교가 되는 것이고 결국 이교가 되는 것이다.


어떻게 유일신을 믿는 히브리인들의 사고에 “전능하신 하나님” 외에 따로 “대능한 하나님”을 상정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그것을 그들의 성경에까지 기록해 둘 수 있었겠는가! 이처럼 이단자들은 학문적으로도 무식할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대단히 어리석은 자들인 것이 드러난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혜와 지식의 하나님이시고 따라서 그의 자녀들에게도 지혜와 지식을 주시는 분이시다.
특별히 히브리어는 어린아이의 언어와 같은 단순한 언어이다. 따라서 히브리어에는 “전능” 에 해당하는 단어가 따로 없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구약 성경에서는 이 Gibbor(강한 자, 용사)라는 단어가 사람과 하나님께 대해 공히 사용되고 있다.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을 El Gibbor라 칭했다면 그것은 “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의미도 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도 되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따로 “전능”에 해당하는 단어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은 당연히 “능하심”에 한이 없으신 분이시므로 그들은 굳이 “전능하신”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낼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히브리어 성경에 El Shaddai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이 칭호는 흔히 우리말과 영어로 “전능하신 하나님”, “Almighty God”으로 번역되고 있지만 이 Shaddai라는 단어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하여간 El Gibbor가 되었든 El Shaddai가 되었든 모두 히브리인들에게는 이방의 우상들과 구별되시는 그들의 하나님 곧 “살아계신 참 하나님”, “능력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을 의미했다. 구약 성경에 야웨 하나님에 대해 이 Gibbor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들은 모두가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이사야 9장에 이어지는 10장의 21절에도 이사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El Gibbor”라고 표현하고 있다.(“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그러므로 9장 6절의 “El Gibbor”도 그들에게는 당연히 “전능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다른 존재가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은 아주 중요하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이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하나님 야웨에 대해 이 Gibbor라는 표현을 사용한 구절들이 많다. 그리고 이들 구절들 속에 하나님을 묘사하는 다른 형용사들이나 명사들이 모두 최상급이나 omni-에 해당하는 말이 붙어 있지 않아도 Gibbor와 마찬가지로 그것들도 하나님의 절대성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히브리인들에게는 당연한 전제였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광대하시다하면 그 광대하심은 한계가 없는 것이므로 굳이 매번 “한이 없이” 광대하시다라고 말할 필요를 그들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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