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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 기독론 : 요한의 기독론(1)

필자는 지금까지 바울서신들을 토대로 사도 바울의 기독론적 교훈들을 살펴봤다.

이제는 요한복음을 토대로 사도 요한의 기독론적 교훈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사도 요한은 사도 바울 못지않게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관한 선명하고도 깊이 있는 많은 교훈들을 전달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에 관한 그의 복음서를 저술함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존재성 곧 신성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요한복음서를 저술했다.
그런 면에서 요한복음서는 공관복음서에 비해 여러 가지 점들에서 다른 국면들을 제시하고 있다. 특별히 요한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국면은 바로 기독론적 국면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록 표면적으로 나사렛 예수라는 인간의 존재로 사시면서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셨지만, 동시에 그 분의 근본적인 존재성은 하나님과 동등한 신적인 존재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의 신비로운 연합의 관계성 속에서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셨다는 것을 부각시킨다.


요한은 ‘아버지’와 ‘아들’이란 가족 관계의 용어들을 계속적으로 수없이 많이 사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분명하게 지속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계시하는 그의 공생애 사역을 완수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통해 그 분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가셨으며 지금은 보혜사 성령이라는 삼위일체의 제 삼위의 하나님의 존재로 다시 오셔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기독론적 국면을 가장 선명하게 제기하고 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한 존재성 곧 나사렛 예수로서 역사상의 구체적인 한 사람이 되신 그의 인성과 동시에 하나님과 신비하게 연합된 관계성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권능과 영광을 갖고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성이 결합되어 있는 존재성을 나타내기 위해 적절하면서도 독특한 단어들과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 독특한 단어들과 용어들 중에는 ‘로고스’와 ‘독생자’와 “나는…이다”(I AM)라는 것들이 있다. 필자는 요한이 독특하게 사용한 이런 단어들과 용어들을 중심으로 요한의 기독론을 (1) 로고스 기독론, (2) 하나님의 아들(사람의 아들, 독생자, 그 아들) 기독론, (3) “나는…이다”(I AM) 기독론의 제목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로고스 기독론이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시작함에 있어서 예수의 동정녀 출생과 어린 시절에 관한 것들을 제시한 공관복음서와 사뭇 다르게 선재하시는 로고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근본적 존재성 곧 그분이 세상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재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계셨다는 선재의 신학에 기초한 로고스 찬미가를 그의 복음서 서두에 제시한다(요1:1~18). 이 로고스 찬미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근본적 존재성과 그분의 사역의 목적을 요약적으로 제시한다.


요한은 이 찬미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근본적 존재성은 한 마디로 말하면 “아버지의 독생자”(요1:14)이며 또한 “독생하신 하나님”(요1:18)이라는 신성과 인성의 신비한 연합으로 이뤄진 유일하고 신비로운 존재라는 것을 제시한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신비한 존재성을 표현하기 위해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해 영원한 신성과 창조의 권능을 가진 로고스가 신비로운 방식으로 ‘화육’ 혹은 ‘성육신’(“육신이 되셨다”)하신 것을 제시한다. 요한의 기독론의 첫 번째 특징은 바로 이 ‘로고스’라는 단어와 이 로고스의 ‘화육’이라는 신학적 의미를 통해 제시된 것에 있다. 따라서 요한의 기독론의 첫째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 로고스의 의미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로고스라는 단어는 헬레니즘 시대의 종교와 철학에서 익숙하게 사용됐다. 신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이 단어를 중요하게 사용한 사람들은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이었다. 스토아학파에서 로고스는 우주의 이성이며 우주의 중심에 있는 정신으로서 우주에 질서와 구조를 제공하는 존재이다.
세계는 로고스라는 이 신적인 우주 이성에 의하여 질서와 구조를 유지할 뿐 아니라, 이 우주정신의 일부분이 각 사람 안에 거주하며 이것이 각 사람으로 하여금 우주의 중심과 관련을 맺게 한다는 것이다. 이 로고스의 파면(씨)이 인간 내부에 존재하여 자연의 질서와 법칙을 발견하고 그것에 순응하게 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내부에 있는 로고스의 파면을 따라 순종할 때 변화무쌍한 고난의 세상에서 참된 평화와 만족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신구약 중간기에 디아스포라 지역에서 발전한 헬레니즘계 유대교에서도 로고스는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가진 단어로 사용되었다. 헬레니즘계 유대교의 대표적산물인 헬라어역 구약성경인 70인경에서 여호와의 ‘말씀’(히브리어 ‘다바르’)이 헬라어 ‘로고스’로 번역됐다.
구약성경에서 여호와의 말씀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창조의 역사를 실행한 권능자이며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실제적으로 실행한 구원자이며 예언자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치고 경고하며 인도한 주권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다. 그래서 헬레니즘계 유대교에서 로고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의 창조와 구속과 주권을 실행하는 실행자의 의미로 사용됐다.


헬레니즘계 유대교에서 로고스는 지혜 개념과도 연결됐는데, 지혜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신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서 창조의 실행자로 등장하기도 하고(잠8:22~31) 또한 하나님의 백성의 참되고 올바른 삶을 위해 계시되고 기록된 말씀인 ‘토라’와 연결되어 제시됐다. 요한은 이와 같이 헬라문화권의 이방인들은 물론 유대인들에게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다양하고 풍부한 전승을 가진 개념의 단어를 사용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을 제시한 것이다. 요한은 스토아학파에서도 중심적으로 사용되었고 헬레니즘계 유대교에서도 익숙하게 사용된 로고스를 통해 그가 전달하려는 유일한 진리이며 영원한 생명을 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으로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이 제시하는 로고스는 신적인 인격과 권능의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화육’(“육신이 되심”)하여 나사렛 예수,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역사상의 구체적인 한 사람의 인간이 됐다는 것이다.
요한은 먼저 기독교 신학에서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교회사적으로 확립되고 사용되고 있는 용어인 ‘삼위일체’라는 말로 설명되는 영원한 신성의 연합체로서의 로고스를 제시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이 구절에서 ‘말씀’으로 번역된 단어가 헬라어로 ‘로고스’이다.
이 구절은 세 개의 소절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소절이 로고스의 존재성을 각각의 개념으로 전달하고 있다. 요한은 특히 로고스 앞에 관사를 붙임으로써 직역하면 “그 말씀”이 되며 그것은 요한이 제시하려는 로고스가 헬라 철학이나 헬라계 유대교에서 사용하는 로고스와는 구별된 “그 로고스”로서 제시하려는 요한의 의도를 반영한다.


첫째 소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것이다. ‘태초’라는 단어는 헬라 철학에서 만물의 근원과 만유의 시작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됐다. 보이는 우주 세계의 만물이 언제 어떻게 시작됐는가의 질문에 익숙하게 사용된 단어이기도 하다. 신구약 성경은 만유의 시작을 명백하게 하나님의 창조와 연결하여 제시된다.
그래서 구약의 첫 책인 창세기의 시작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심으로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이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이 제시한 것으로서 “태초에 그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소절은 말씀이 태초부터 존재했다는 의미의 말씀이 아니다. ‘계시니라’로 번역된 동사는 헬라어 동사 ‘에이미’(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함)의 미완료 시제로 되어 있다. 헬라어 동사의 미완료 시제는 과거 진행형의 의미를 나타낸다. 그래서 이 소절은 그 말씀이 태초부터 계셨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태초를 기준으로 할 때, 그 말씀은 태초이전부터 존재해오고 계셨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그래서 이 소절은 그 말씀의 존재의 영원성을 나타낸다. 그 말씀의 존재의 영원성은 그 말씀이 태초 이전부터 존재하고 계셨으며 그래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에 의해 지음을 받게 됐다는 구절(요1:3)과도 연결된다. 요한은 먼저 그 로고스의 영원한 존재성과 하나님 되심을 선언한 것이다.


김광수 교수
침신대 신학과 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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