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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과 변화의 사이

가정회복-19

“과연 변할까?”라는 질문에서 우리 모두는 자유롭지 않다. 경계선적 성격장애(BPD)나 불안증, 우울증 등의 증상을 가지고 힘들어 하시는 분들이 흔히 표현하는 것은 깊은 무기력감과 절망감이다. ‘나의 상황이 과연 나아질까’ ‘나는 과연 변할 수 있을까’ ‘과연 내게 희망이 있을까’라는 질문과 회의감에 시달린다. 희망을 가지고 이리저리 환경도 바꿔보고 직장이나 교회 등 주위 사람들을 바꿔 봐도 묘하게 비슷한 문제가 반복된다. 처음에는 다시 한 번 힘을 내고 이번만은 다르지 않을까 기대한다. 다른 직장, 다른 교회, 다른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문제가 없어지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내 안에 깊이 잠재된 외로움, 소외감, 열등감, 실패감, 분노, 인간관계의 문제들은 장소나 사람들을 바꿔도 또 드러나기 마련이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늘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다 보면 스스로 지치게 마련이다. 거기에 지쳐가는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 등을 돌리기도 하고 답답한 마음에 정신 차리라는 등 심한 말로 쏘아붙이기도 한다. 주위의 사람들을 하나둘씩 잃다 보면 다 포기하고 싶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될 때도 있다. 잔인한 세상 탓을 하며 모든 사람들을 멀리하기로 작정하기도 한다.

때로는 돕는 사람들, 특히 목회자, 교회 리더들, 상담자들에게도 쉽게 찾아오는 감정이 바로 이 무기력감이다. ‘내가 아무리 애를 쓴다한들 과연 저 사람이 변할까’라는 회의감이다. 내가 평생을 바쳐 수고한 사역이 결국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내가 아무리 도와주려고 해도 상대방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은 납득이 가면서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내가 아무리 애써도 소용이 없다는 깊은 절망감이 우리 모두를 찾아올 때가 있다. 그때 우리는 아주 깊은 캄캄한 심연으로 계속 가라앉는 듯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30여 년을 우울증으로 고통받던 J씨는 최근 정신과의사로부터 경계선적 성격장애의 가능성을 시사받고 상담소를 찾았다.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도 지난 20년간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인지치료, 전기치료, 정신역동치료 등등 온갖 종류의 모델로 상담을 받았다. 직장을 잃은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당시, 이제는 자신을 먹여 살리고 계시는 부모님마저 돌아가실까봐 극단적인 두려움에 시달렸다.

J씨는 끊임없이 변화를 원했다. 우울감에 젖어 있는 자신이 싫었다. 상담자든 친구들이든 누군가가 자신의 우울한 감정을 없애주기만 원했다. 늘 자신 없고 예민하며 남들과는 뭔가 다른 듯한 자신의 모습을 통째로 뒤집어 바꾸기 원했다. 뭔가를 똑 부러지게 해내지 못하고 한 직장도 오래 유지하지 못했던 자신의 무능을 수도 없이 탓했다. 그러다 술로 자신의 실패감을 지우려 했고 잊어버리고자 했다. 차츰 술에 취해 심하게 주사를 부리는 그의 옆에는 어느 친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자신 안에 뿌리 깊은 우울감과 외로움, 절망감을 어쩌지 못했던 그는 몇 번의 자살시도 끝에 다시 한 번 새로운 상담자를 찾아오면서 물었다. 과연 변증법적 행동치료(DBT)라는 또 다른 상담기법이 자신을 도울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30년을 넘도록 반복해온 자신의 문제가 과연 해결될 가능성이 있느냐는 질문이며 깊은 회의감이었다.

경계선적 성격장애를 돕는 모델로서 Linehan 박사가 발전시킨 변증법적 행동치료(DBT)는 한 가지 중요한 개념을 제시한다. 바로 수용과 변화가 공존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우리는 흔히 변화에 초점을 둔다. 우울증이나 불안증, 성격장애의 증상을 완전히 없애고만 싶어한다.
불면증을 해결하고 싶다. 내가 가진 성격적 단점을 완전히 바꾸고 싶다. 실패자로 살아온 삶을 통째로 갈아엎고 싶다. 내 배우자도 자녀들도 좀 더 나아져야 한다고 바뀌어야 한다고 볶는다. 우리 직장도 이렇게 바뀌어야 하고, 우리 교회도 저렇게 체질개선을 해야만 한다. 현재의 상태는 절망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먼저 나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수용, 즉 받아들임이 없다면 우리는 변화할 힘을 찾지 못한다. 예민한 사람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할 수 있다. 내성적인 사람들은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줄 줄 안다. 적은 한 두 사람과도 깊이 있는 우정을 쌓아가는 법을 안다. 우울한 느낌은 누구나가 겪는 감정이며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슬퍼할 줄 모르는 사람은 공감할 줄도 모른다. 불안감도 우리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감정이다. 불안하지 않으면 긴장하지 않고 스스로를 보호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 미움은 대부분 사랑해서 공존한다. 부정적인 감정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그 긍정적인 역할을 깨닫게 된다. 부정적이라고만 생각했던 나 자신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그 안에 보석이 찾아진다.

J씨는 우울증과 성격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30년간 지속해온 생활습관을 바꿔야 했다. 깜깜한 방에서 나와 낮 동안 좀 더 육체적 활동과 운동량을 늘려서 햇빛에 자신을 노출시켰다. 술자리를 피했지만 친구에게 먼저 전화를 하는 연습을 하기도 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룹상담에 참여하기도 했다. 인터넷으로 사업을 하는 아이디어를 조금씩 현실화시키기도 했다. 불안하거나 자살의 욕구가 들면 상담시간에 나눴던 새로운 기분전환의 방법들, 건강한 행동 패턴을 연습해야 했다. 그는 새로운 시도들을 했다가도 또 실망하고 다시 한 번 일어섰다가도 또 넘어지곤 했다. 30년을 반복한 행동과 생활습관을 바꾼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J씨가 그 모든 변화 전에 해야 했던 것은 슬프고 불안하고 외로웠던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슬플 때 슬프다고, 아플때 아프다고 인정하는 것이었다. 슬프거나 외로울 때에 조차도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일이었다. 또 넘어졌을 때에도 그럴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용서해 주는 것이다. 잘하고 있다고, 자신을 향해 ‘You are okay”라고 말하며 애쓰고 있는 자신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이었다.

수용과 변화의 공존, 그 둘의 균형이라는 개념은 변증법적 행동치료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이루셨다. 십자가를 통해서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으셨다. 우리가 똑똑해서 잘나서 뭔가를 이뤄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인임을 아셨고 완전하지 않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아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모든 허물을 대신 지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그 무조건적인 받아들임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그 주님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고 도전하신다. 세상 끝까지 나아가서 제자삼으라고 격려하신다. 그 일을 혼자 해내라고 말하지 않으시고,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수용과 변화의 완벽한 균형을 이루셨다. 우리의 구원도 치유도 바로 그분 안에 있다. 모든 치유의 모델은 십자가에 있다.

심연희 사모
RTP지구촌교회(미주) Life Plus Family Center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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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이사야 43:19) 새해를 은혜로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팬데믹에서 엔데믹으로, 코로나에서 자유하게 하시고, 침체된 교회들이 회복의 문턱을 넘어 서서 활기차게 성장할 기회를 주신 것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고통스러운 터널에서 견디게 하시고, 인내와 절제를 통해 새로움을 기대하게 하셨으니, 새해에는 고통스러웠던 모든 옛 일을 딛고 일어서며, 다시 시작하는 마음과 결단으로 새시대를 열어 나가겠습니다.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세상사람들 가운데 어떤이들이 말하기를 교회에는 희망이 없다고도 말합니다. 교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한 이유도 있고, 이단들의 폐혜를 본 사람들도 있으며, 여러 사회적 상황속에서 무작정 불신이 팽배한 이유가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이 땅의 희망이자 소망입니다. 세상의 마지노선은 오직 교회 뿐입니다. 세상을 지키고 의와 생명을 주는 최종병기는 예수그리스도가 주인이신 오직 교회입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생명을 허락하셔서 성령님으로 몸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랑과 희망이 교회이기에, 세상도 여전히 교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