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에 지난 5월 14일부터 내리기 시작한 집중호우로 강이 범람하고, 산사태가 발생하여 50만명의 이재민과 200여명의 실종(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아직도 간헐적으로 비가 내리고 있어, 10일이 넘도록 가옥들이 물에 잠겨있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다행히 주민들은 안전히 대피하여 인근학교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화장실과 식수와 옷 등의 부족과 치안의 부재로 또 다른 어려움들을 겪고 있습니다. 현지 정부에서 수재민들에게 음식은 일부 공급하고 있기에 식량의 문제는 없는데, 비누, 칫솔, 치약, 수건, 속옷, 신발 등의 개인위생 물품들이 시급하고도 절실히 필요합니다. 지금이 수재민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할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속히 비가 멈추어서 물이 빠지도록, 수해로 인해 실의와 절망과 고통에 빠져있는 수재민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할 도움의 손길들이 모아지도록 간절히 기도해주세요! C 선교사 /침례교 해외선교회 후원계좌 : 외환 990-007953-925 스리랑카빈민
광복 당시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 중의 하나였지만 이제 G-20 회원이 될 만큼 영향력 있는 국가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남과 북이 갈라서는 아픔을 지금까지 겪고 있는데 70년의 세월은 정치, 경제, 사회 분야는 말할 것도 없이 언어, 교육, 복지, 음식, 의상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에서 큰 차이를 만들었다. 무엇보다 남북 간의 경제력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2010년 통계에 따르면 남한의 국민총소득(Gross National Income, GNI)은 10,146억 달러로 260억 달러인 북한의 39배이고, 1인당 GNI에 있어서도 남한은 20,759 달러로 1,074 달러에 그친 북한의 19배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북한의 김정은은 ‘경제-핵 병진노선’으로 강성대국의 모습을 전 세계에 알리려 했지만 경제는 피폐하여 외국의 원조 없이는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그래서 배급마저 끊긴 북한에서 장사로만 생명을 유지해온 ‘장마당 세대’는 북한의 체제 이완을 가속화시키는 세대로 부상하고 있다. 이즈음 박근혜 대통령은 2014년 1월 신년기자회견에서 ‘통일은 대박이다’는 기자회견을 발표하여 통일에 대한 기대감과 당위성을 널리 확산시켜 나가고 있다. 그렇다
1. 사역의 동기 대지진을 경험하고 7~8월에 귀국한 선교사 가정들을 Debriefing 하면서 외상과 관련된 두 가지 척도검사를 실시했다. PTSD로 진행될 가능성을 Screening하는 도구인 ‘외상 후 위기 체크리스트’(PRC: Posttranma Risk Checklist)와 PTSD 진단과 증상 심각성을 자기 보고식으로 평가하기 위한 도구인 ‘외상 후 진단 척도’(Posttraumatic Diagnostic Scale: PDS)가 그것이다. 두 검사에서 고위기군(群)과 고위험군(群)으로 나온 사람들은 거의 동일했다. 예를 들어 한 가족 가운데서도 자발적 회복군인 가족원은 저위기군으로 나왔으며, ‘외상 후 위기 체크리스트’에서 PTSD로 진행될 가능성이 다소 높은 고위기군으로 나온 사람들은 ‘외상 후 진단 척도’에서도 고위험군(群)으로 나타났다. 이는 외상을 경험한 사람들의 환경적 영향과 함께 타고난 기질적 영향도 있는 것으로 보여서, ‘기질 및 성격검사’(TCI: Temperament and Character Inventory)도 추가로 실시하게 됐다. 기질 및 성격검사에서 불안과 관련된 ‘위험 회피’ 점수가 높은 사람들이, 앞의 두 검사에서 고위기
1. 제3차 케어팀 파견 물질세계와 영적세계가 서로 연관이 있어서인지, 네팔 지진은 땅만 흔든 것이 아니라, 선교사들의 영혼도 마구 흔들어 버린 것을 알 수 있었다. 한국위기관리재단에서 파견한 3차 케어팀(8.3~10일, MCC 이경애 선교사 외 2명)은 3가지 목적을 가지고 네팔 한인 선교사들을 방문했다. 1~2차 케어팀 방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지진 트라우마 후유증을 겪고 있는 선교사들을 돕고, 지진 충격으로 인하여 자극된 내면의 심적 위기 요인들을 인식하고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함이며, 부부관계 팀워크 관계 갈등의 뿌리를 이해하고 성숙한 의사소통 및 팀워크가 가능하도록 훈련하기 위함이었다. 지진 발생 이후 연일 편안한 잠 한 번 잘 수 없었고, 여진이 한 번씩 있을 때마다 ‘또 왔구나!’하면서 온몸으로 공포를 느끼며,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선교사들이 많았다. 또한 하루에도 몇 번씩 발밑의 지반이 흔들리는 느낌에 민감해져 있었고, 이유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과잉 각성상태가 지속되는 선교사와 자녀들도 많았다. 2차에 걸쳐 진행된 디브리핑 사역은 이러한 외상 후 스트레스 증상들을 많이 완화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케
중국, 교회 강제 철거 중 여성 신자를 산채로 묻어 중국 헤난성에서 교회를 철거하던 철거반이 저항하던 기독교인 부부를 산채로 묻어 버렸고, 결국 부인은 사망했다. 딩 쿠이메이와 그녀의 남편인 리 지앙옹는 지난 4월 14일, 철거회사에서 불도저를 동원하여 그들이 출석하는 주마디안 소재 베이토우 교회를 철거하려 하자 불도저를 막아섰다. 이 교회는 교회가 세워져 있는 땅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당국과 이해관계자들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 결국 철거회사 측은 철거를 강행했고 이들은 산채로 매장 되어 버렸다. 한참 후에 그들을 덮고 있던 흙더미가 치워졌을 때, 딩 쿠이메이는 이미 질식하여 사망한 상태였다. 한편 현장에 있던 한 교인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철거팀을 이끌고 있던 사람이 “산채로 묻어버려라. 내가 책임진다.”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불도저는 이들 부부를 가까이에 있던 움푹 패어진 웅덩이로 밀어 버렸고, 이어 흙을 덮었다는 것이다. 흙이 덮이자 남편인 리 지앙홍은 흙을 헤치고 자력으로 빠져 나왔으나 그의 아내인 딩 쿠이메이는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 사건을 수사 중인 공안은 철거팀원 두 명을 구속 수사 중이다. 성서공회 , 작
네팔의 카드만두 길거리에는 무너져 내려 나뒹구는 벽돌들과 흙먼지가 길 위에 자욱했다. 곳곳에 지붕과 벽들이 허물어져 내린 건물들이 즐비하였고, 그 앞에 뜨거운 태양 빛을 받으며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이리와 우리 집 안을 보세요. 안은 더욱 더 엉망이 되었어요.”라고 하며, 한 노파가 우리를 불러 세웠다. 비닐 천막에 여기저기 누워 있던 네팔인들은 외국인들을 향해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팔 대지진 후 한인 선교사들은 꾸준히 구호사역을 해 오고 있었다. 천재지변의 대 참사 앞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참담함은, 구호의 손길을 통해서 차츰 현실적인 도움을 받으며 안정을 찾으려고 무너진 벽을 다시 세웠고, 집안 가득히 채워진 흙과 벽돌들을 바구니에 담아 옮겼다. 그들의 땀방울은 삶의 터전을 복구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들려오는 여진과 홍수로 인한 인명피해 소식은 그들의 마음을 또 다시 긴장시켰다. 지진을 겪은 네팔의 한국 선교사들과 자녀들에게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들이 나타났다. 틱 장애, 등교 거부, 불안증, 음식 거부, 공포증 등의 증상들이 나타났다. 한국에서 심리 상담사와 아동 상담사들이 카톡
고난 중에 안식을 주시는 주를 높여 드립니다(신 12:9절). 이미 아시겠지만, 구마모토현 마시키마치를 중심으로 지난 4월 14일 밤 9:26분에 최대 진도 7의 전진에 이어 4월 16일 새벽 1:25분에는 최대 7.3의 본진이 발생했습니다. 저희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구마모토현 전체는 그야말로 “패닉상태”에 빠졌습니다. 2016년 구마모토지진으로 명명된 이번 지진으로 2주가 지난 4월 28일 현재 49명의 사망자, 1명의 실종자, 1000여 명 이상의 부상자를 내고 있습니다. 피해가 가장 큰 마시키마치를 중심으로 저희 가족이 거주하는 구마모토시, 미나미아소무라 그리고 오이타현 일부 지역까지 피해지역이 확대됐습니다. 아마 3500여 채 이상의 집들이 파손되고, 한때 10만 명 이상이 피난소나 자동차에서 생활하기도 했습니다. 크고 작은 여진이 1000회를 넘어선 상황이라 구마모토지진은 현재 진행중이며, 심각한 피해를 입은 지역과 주택의 복구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역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현 내 80여개 교회 중 적지 않은 교회 예배당이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저희 히쯔지노무레(양무리)교회의 예배 처소 역시
6월 8일 선교사들을 디브리핑하고 상담하고자 네팔에 도착한 우리는 개인 상담을 시작으로 이튿날부터 3일간 오전엔 남자 집단 상담과 미술치료, 오후와 저녁엔 부부상담, 개인, 가족 상담을 진행했다. 많은 선교사들이 지진으로 인해 두려움과 무기력감, 탈진, 죄책감, 불면증 등으로 어려워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지진 후, 침대나 소파에만 누우면 흔들리는 느낌이 계속 있고 지진이 또 날 것 같은 두려움에 힘들어 했다. 어떤 분은 지진 후 50여 일간 밥을 전혀 먹지 못해 치료차 한국으로 들어간 분도 있었다. 하지만 이 선교사를 더 힘들게 한 것은 “지금 한국에 오면 어떻게 하냐? 그곳에 있어야 되는 거 아니냐?”라는 한국교회의 반응이어서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말에 매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선교사들은 모두 구호사업에 나서서 한국에서 보내온 돈으로 물품을 이곳저곳에서 사서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고 보살피는 일을 하느라 너무나 바빴다. 이들의 사역지는 대부분 차로 험한 길을 여러 시간 동안 가서 또 며칠 동안 산을 넘고 또 넘어서 가야만 되는 곳에 있다. 그래서 한국 선교사들은 많이 지쳐 있었고 탈진해 있었다. 이들을 위해 누군가 들어주고 쉬어야
2015년 4월 27일 아침 네팔 선교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지금 여진이 계속 오고 있어요! 지난 3일 동안 집안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공원에서 유숙했어요. 사모님들이 무서워하고, 지진 트라우마로 힘들어 하고 있어요. 국제단체에서는 어제부터 멤버케어 팀이 들어오고 있는 것 같아요. 저희들에게는 위로가 필요하고 특별히 사모들에게는 청심환도 많이 필요해요.” 청심환? 그것은 정말 위급할 때 사용하는 구급약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런 약이 필요한 상태라고? 그리고 그들에게 위로가 필요하다고? 나의 상식으로는 지진 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지낼 곳이 필요할 것 같았는데, 선교사님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라는 것이었다. 바로 항공권을 구입하였다. 5월 12일 오후 네팔 카투만두에 도착 후 마중 나올 선교사님을 기다리는 순간에 제2차 강진이 발생하였다. 지진을 처음 경험한 나는 지진으로 인해 우왕좌왕 하는 주변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네팔 사람들은 흔들리는 공항 청사 앞에 서 있는 나에게 나무가 흔들리고, 건물이 흔들리는 것을 가리키면서 속히 대피하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선교사들을 위해 가져 온 반찬과 의약품, 그리고 한국위기관리재단의
1. 위기(재난) 관리 평가 가. 선교사회의 좋은 전통 기독교를 억압하고 선교활동에 적대적인 네팔의 분위기와 정부정책으로 선교사회 내에는 서로 돕고 위로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초창기 선교사들로부터 선교사들 간의 친목과 화합을 절대적인 가치로 인식하는 좋은 전통이 세워진 것이, 갑작스럽게 닥친 대지진이라는 큰 재난 중에서도 선교사회가 힘을 합쳐 연합 구호활동을 효과적으로 신속하게 해 나갈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나. 비상 연락망 확보 또 네팔인들의 느긋한 천성과 견고한 공동체 의식으로 인해 재난상황에서도 사회 질서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 또한 선교사들이 구호활동에 안심하고 집중할 수 있었던 주요한 여건이 되었다. 음성통화가 불가능한 상태였음에도 3G 데이터 통신이 작동하여 카카오톡(카톡) 통신이 가능했던 것이, 신속하고 효과적인 구호활동을 가능케 했던 절대적인 요소였다. 재난지역으로 급파된 구호물품 운반팀과 이루어진 카톡 통신으로 현지 상황파악은 물론, 구호물자 확보, 재정 확보, 자원봉사 자원 활용, 미디어 정보전달 등에 있어서 실시간 정보교류가 이루어짐에 따라, 재난대책본부 상황실은 순간순간의 필요에 빠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