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니시자카 순교지)나가사키시 니시자카 순교지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순교지이다. 금교령 하에서 정확한 장소는 확실치 않으나 여러 사료를 통해 이전부터 바테렌 부정지(선교사 처형지)로 알려져 온 현재의 니시자카 언덕으로 추정되고 있다. 26인의 순교자가 처형된 것은 1597년 2월 5일로, 1962년 기념비와 기념관이 건립되어 니시자카 공원으로 조성됐다.토쿠카와의 에도 막부는 종문개역을 효과적으로 적용하기 위해 구체적인 몇 가지의 제도를 실시했는데 현상소인제도와 오인조연좌제 그리고 에부미와 사청제도 및 종문인별개제도였다. 현상소인제도는 키리스탄을 고발하는 사람에게 상금을 수여하는 제도였다. (키리스탄 적발 포고문[인본 26순교자기념관])에도 막부와 각 번은 크리스천의 적발을 위한 목적으로 정보제공자에게 상금을 주는 제도를 시행하여, 1618년 나가사키에서는 은봉30개를 상금으로 준다는 포고문도 걸렸다. “선교사, 수도사, 그리고 신도를 신고하는 자에게는 즉시 은을 수여한다”는 포고문이었다. 5인조연좌제는 연대책임을 지우는 제도였다. 원래는 다섯 가구씩을 한 조로 편성하여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제도였으나 크리스천 적발을 위해 이용된 감시제도였다. 같은
(이키츠키 박물관)이키츠키 섬의 역사와 생활을 소개하는 박물관으로, 히라토 섬에서 이키츠키 섬으로 건너가는 이키츠키 대교의 건너편 교각 부근에 위치해 있다.이층의 전시실에서는 자비에르 선교사 이후 현재까지 이키츠키 섬에서 비밀스럽게 신앙을 지켜온 카쿠레(위장) 크리스천의 역사를 살펴볼 수가 있다.산 주안 순교지는 카밀로 콘스탄치오 선교사를 도왔던 이키츠키의 무사 산 주안 사카모토자에몬을 포함하여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순교한 곳이다. 이 섬은 후에 산 주안이라 불리며 이키츠키의 크리스천 성지가 됐는데 섬의 갈라진 바위 틈새로 솟아 나오는 물은 세례에 사용되었다고 전한다. (산주안 순교지)토마스 니시의 부친인 가스파루 니시는 1609년에 처형되어 이키츠키 최초의 순교자가 됐다. 그는 당시 십자가가 세워진 묘지에서 처형되기를 소망했다고 하는데, 그곳은 후에 ‘쿠로세노츠지’라고 불리게 됐다. 자비에르 일행이 떠난 뒤 히라토는 이키츠키, 타쿠시마, 네시코 등의 영주인 코테타가 키리스탄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됐다. 1566년에 크리스천이었던 오로쿠닌사마가 불교도인 영주의 명령에 반항하다가 네시코 해변의 바위에서 처형됐다. (네시코 해변의 승천석)코테타가의 자손들은 159
일례로 2년 이상의 장기간에 걸친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시리아 무슬림들이 요르단, 터키, 레바논 등 주변국가로 대거 유입이 됐는데, 이들 난민들에게 구호사역과 함께 직접적인 복음전도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시리아 난민 무슬림들에게 물질적인 도움과 함께 복음을 전하고 아랍어 성경, 전도 책자 등을 나눠 주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이전에 없던 전대미문의 일로써, 길을 여시고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이자 무슬림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절호의 기회로 생각되는 것이다. 또한 선교에 미치는 부정적인 측면으로는 민주화 과정에서 치안의 부재와 체제 불안으로 선교사들의 안전이 위협되어 사역이 위축될 수 있다. 선교사들이 피랍되거나 순교의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고, 애써 일구어 놓은 사역지에서 철수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또 혁명의 공과를 둘러싼 권력 암투가 진행되고, 선거 과정에서 선명성을 내세운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 일시적으로 득세할 수 있다. 한편 구호 사역이나 지역개발 사역의 현장에서 이를 통해 민심을 얻으려는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과 복음을 전파하려는 기독교 선교사들이 직접 부딪히게 될 가능성들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히라토 항)히라도 항은 전국시대 이전부터 대륙과 교역을 해왔으며, 마츠우라 당이라고 불리는 왜구의 근거지였다.16세기 초 동남아 해역에서 활동하던 중국(명) 해상 왕 오봉왕직은 1540년 일본의 고토에서 교역을 시작했다. 그는 히라토의 영주 마츠우라 타카노부의 초청을 받아 히라토에 상관을 개설했다. 1550년 6월 오봉왕직의 권유로 최초의 포르투갈 선이 히라토 항에 입항하게 됐다. 이후 히라토는 오봉왕직의 항로 안내를 통해 포르투갈과 중국과의 교역의 중심지로 번영했다.(언덕위의 히라토)미나모토 요리미츠의 부장인 와타나베의 손자가 큐슈의 마츠우라에 진입하여 마츠우라씨를 자칭하며 마츠우라 48당이라고 불리는 왜구를 주력으로 하는 호족이 됐다. 이곳에 처음으로 성을 쌓은 것은 마츠우라가 조선 침략 전쟁으로부터 귀국한 1599년이며, 그 후 한 때 파괴됐다가 1707년에 다시 축성됐다. 이 성은 카메오카 산이라고 하는 바다에 돌출한 둥근 산을 이용해 쌓았는데, 제일 높은 곳에 중심건물을 두고, 그 남쪽으로 성의 외곽, 그 서쪽으로 산노마루를 두었다. 천수각은 지어지지 않았지만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로서, 산상의 건물은 1875년에 해체되어 황폐했으나,
3. 중동 이슬람권 선교의 발자취우리 침례교단이 중동 이슬람권 선교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불과 수년 내의 일이다. 이는 침례교단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의 관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중동이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한국과 멀고, 이 지역에서 선교적인 열매를 거둔다는 것이 요원했기 때문에, 복음의 추수가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는 지역에 우선적으로 선교역량을 더 집중했던데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2013년 3월 현재 침례교 중동지부에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는 6개국(요르단, 이스라엘, 오만, 이집트, 아랍에미리트, 레바논)에서 10Unit이 사역하고 있다. 사역 내용을 살펴보면,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교회를 개척, 운영하며 제자훈련과 이슬람권 사역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는 두 가정(요르단, 이스라엘)이 있고, 한인교회 사역을 감당하면서 구제 및 복음전도, 교회개척 사역을 하는 가정(오만)이 있다. 또한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대상으로 지역개발과 복음 전도를 감당하는 가정(요르단)이 있고, 이라크난민과 시리아난민을 대상으로 구호 및 복음전도, 교회개척 사역을 하는 가정(요르단)이 있다. NGO와 연계된 유치
(자식버린 골짜기[코스테타니]에 세워진 기념비) 사가 번의 부동산의 크리스천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이 있던 당시, 험악한 무사들에게 쫓겨 오오부네 부락으로부터 산을 향해 급히 도망하던 크리스천 신도들이, 점차 사태가 급박해지자 팔과 다리에 들러붙는 어린 자식들을, 이 골짜기 아래쪽으로 던져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 자식 버린 골짜기(코스테타니)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자식 버린 골짜기(코스테타니)에서 700여 미터 올라간 야마모토카와의 산기슭에 엿보는 곳(노조에)이라는 곳이 있는데, 자식을 버리고 산으로 피신한 신도들이, 버리고 온 자식들이 걱정되어 산에서 내려와 그곳에서 엿봤다고 하여 노조쿠(엿보다)가 변하여 노조에라고 불리게 됐다고 전한다. (엿보는 곳[노조에]에 세워진 기념비)무사들의 토벌을 피해 급히 피신하던 크리스천 신도들이 당황하여 코스테타니에 자녀들을 버렸으나, 도망 중에 버리고 온 자녀들이 걱정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부모의 마음. “버린 자식들은 어찌되었을꼬”하며 도망하던 길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엿봤다고 한다. 이후에 노조쿠(엿보다)라는 지명이 변하여 노조에라고 불리게 됐다고 전한다. 당시 혹독한 박해의 시대에 크리스천의 잔혹한 역사로부
(카와타나 크리스천 묘비)카와타나 크리스천 묘비는 오오무라의 코오리 쿠즈레 이후 오오무라영에서 기적적으로 파괴를 면하고 남아 있는 크리스천 묘비의 하나이다. 묘비 상부의 둥근 원 안에 CRVS(크루스, 십자가)와 그 아래에 MACi(만시아, 세례명)를 나타내는 글자를 교묘하게 중복하여 새겨 넣어 크리스천 검색을 피하고자 한 흔적이 엿보인다. 또한 토미나가의 처, 겐나 8년이라는 한자도 새겨져 있어서 카와타나 지역의 크리스천 사무라이 가족의 묘비로 추정된다. 이 같은 화양절충양식의 크리스천 묘비는 전국에서도 진귀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시미 크리스천 묘비)하사미 크리스천 묘석은 크리스천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석공의 손을 빌지 않고 조잡한 솜씨로 가족이 직접 비밀스럽게 십자가 문양만을 음각한 것으로 자연석을 이용하여 토대도 없이 서쪽을 향해 세워져 있다. 이 당시의 엄중한 검색 중에도 남아 있게 된 것은 기존의 다른 묘비들과는 달리 자연석으로 세운 묘비이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지역의 크리스천 분포의 실증자료로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에부미[성화 밟기])에부미(성화 밟기)는 나가사키에서 시작되어 큐슈 내에서 크리스천 적발을 위해 시행된 정신적 고
누가 인도했나?원형교회의 부흥은 곧 바로 다른 교회를 분가시키는 힘이 된다. 원형교회가 잘 되면 다음 교회 분가도 잘 된다는 뜻이다. 그 예를 안디옥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루살렘교회는 정치적 핍박을 받아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일부가 안디옥까지 흩어져 안디옥교회를 세웠다(행 8:1; 11:19). 놀라운 것은 신생 안디옥교회가 교회를 개척하자마자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이다(행 11:21). 왜 그럴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안디옥교회의 창립 멤버가 예루살렘교회 출신들이란 사실이다. 이들 핵심은 마리아와 바나바로 예루살렘에서 이미 가정교회로 성공의 맛을 본 자들로 안디옥교회를 세우는데 그리 힘들지 않았다. 과거에 예루살렘교회에서 성공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수’의 힘이다. 즉 예루살렘교회에서의 사랑과 섬김의 힘은 안디옥교회에 그대로 전수되어 교회 일꾼들을 세우고 복음을 확장시키는데 큰 역할을 감당했다. 안디옥교회에서 바나바와 마리아의 신앙을 전수 받은 자들이 바로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행 13:1) 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신분이 높고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자들이
1. 들어가는 말중동은 기독교 복음이 시작된 발원지이면서도, 세계 복음화 완성의 여정에서 볼 때 사탄의 가장 완강한 보루라고 할 수 있다. 주후 6세기까지만 해도 이 지역은 초대 교회 성도들의 피땀 흘린 노력으로 기독교가 왕성하게 꽃피웠다. 그러나 A.D. 610년경 무함마드로부터 이슬람 공동체가 시작된 이후, 불과 한 세기가 지나기 전에 이 지역은 이슬람교에 의해 초토화됐고, 사탄은 일천년 이상동안 이 지역을 장악하며 이 곳 사람들의 영적인 눈을 가리고 지옥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그동안 이 지역 영혼들을 구원하고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한 시도가 계속 있어 왔다. 특히 19세기 후반 영·미를 중심으로 해외 선교운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던 시기에, 이 지역은 기독교 성지로서 특별한 관심을 받고 많은 서양 선교사들이 내왕했고 사역이 시작됐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특성과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심리적인 저항에 직면하여 선교 사역의 열매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는 중동 이슬람권 선교의 열쇠가 지난 세기 부흥의 주역이었던 한국 교회와 한국 선교사들의 몫으로 남겨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과 수 차례에 걸친
(시마바라 성)1616년 시마바라에 영주로 임명 받아 오게 된 마츠쿠라 시게마사는 7년간의 혹독한 공사를 벌여 1624년 시마바라 성을 축성했다. 마츠쿠라 시게마사의 아들인 마츠쿠라 카츠이에는 시마바라성 건설을 위한 과중한 부담으로 영민을 괴롭게 한 아버지 시게마사 이상으로 중세를 부과하고 금교의 이름으로 크리스천 영민들을 위협했다. 당시 이상기후로 인해 해마다 흉작이 계속됐음에도 불구하고 카츠이에는 혹독하게 세금과 부역을 부과했고 납부하지 못한 영민들의 등에 짚을 지게 하고 거기에 불을 지르는 등 잔혹한 형벌을 시행했다. 1637년 8월경 기아와 흉작 그리고 과중한 세금으로 고통 받는 시마바라와 아마쿠사에 불온한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12월경 세금을 기한 내에 납부하지 못한 쿠치노츠의 임신부를 물고문하여 임신부와 태내 아이까지 살해한 것에 영민들의 분노가 폭발해 시마바라 반도 남부 지역의 대관들을 습격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고 한다.(하라성 혼마루에 세워진 소년장수 야마쿠사 시로 동상)1637년 12월 12일 소년 장수 아마쿠사 시로를 총대장으로 하여 크리스천 신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시마바라와 아마쿠사의 농민군 약 3만7천여 명이 시마바라성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