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시인이 ‘너에게 묻는다’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 너는 누구에게 /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누구에게 뜨거운 사람이 되려면 자신부터 뜨거움이 있어야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교회에 뜨거움이 있길 원하신다.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말씀하시길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3:15)고 하셨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뜨거움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거나 전에는 뜨거웠지만 지금은 식어버렸거나 미지근한 것이 정상적인 줄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셨다. 교회가 어떻게 뜨거울 수 있는가? 우선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동행해 주시면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과 모든 성경에 쓴 자기에게 관한 것을 설명해 주실 때에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웠다고 했다. 곧 그들이 서로 말하길 “길에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24:32)는 대화를 나눴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감동을 받고 은혜가 될 때에 마음이 뜨거워진다. 부산의 모 침례교회
“엄마가 그냥 섬에 굴 따러 가면 산문이 되고,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시가 된다.” 이외수 저(著) ‘절대강자’(해냄, 31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허리띠 매는 색시 마음같이”하면 설명문이 되고, 김영랑 시인이 표현한 것처럼 “허리띠 매는 시악시 마음실 같이”하면 시가 됩니다. 시인은 좋은 시를 위해 한 단어를 놓고 밤을 하얗게 태웁니다. 김훈은 ‘칼의 노래’를 저술하면서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를 놓고 몇 달을 고민했습니다. 한 작가가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소풍을 가자고 해도, 작품 때문에 갈 수가 없다고 해서 친구들만 다녀왔습니다. 작가는 일을 많이 해서 기분이 좋다고 했습니다. 친구들이 기대 속에 원고를 보았는데, 소풍 가기 전 본 것과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묻자 작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종일토록 쉽표(,)를 쌍반점(;)으로 바꿨다가 오늘 다시 쉼표로 바꿨다네. 정말 열심히 일했네…” ‘보바리 부인’의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의 일화입니다. 위대한 작품은 쉼표 하나도 허투루 찍지 않는 치밀함과 정밀함 속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리켜 하나님의 걸작
필자는 지금까지 ‘신약성서의 신학산책’을 진행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다루는 기독론에 관한 내용을 공관복음서와 바울서신과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살펴봤다. 이번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다루는 구원론에 관한 내용을 같은 순서로 진행하려고 한다. 먼저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구원론의 내용은 공생애 예수님의 중심적인 선포인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천국이 가까웠다”라는 말씀에서 간결하면서도 핵심적으로 제시됐다. 그래서 필자는 예수님의 이 선포를 중심으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구원을 “하나님의 나라/천국”이란 핵심적인 어구를 통해 살펴보려고 한다.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관한 요약적 진술에서 예수님의 선포의 중심적인 내용을 “하나님의 나라/천국”을 사용해 제시했다. 마가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한 마디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으로 규정하고 그 선포의 핵심적인 내용을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라고 제시했다. 마태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시작을 “이때로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라는 말씀으로 제시했다. 마
교인에게 은행 보증을 서줬다가 두 번 어려움을 겪어봤다. 그들은 이곳에 친척이나 지인이 없다면서 도움을 주면 교회에 열심히 헌신 봉사하겠다는 조건을 내세우며 부탁해왔다. 하지만 보증을 서줬더니 모두 얼마 후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하고는 연락마저 끊어버렸다. 어쩔 수 없이 보증 서준 자로 은행 빚을 다 갚아줘야만 했다. 잠언에는 이와 관련된 경고성 말씀들이 있다. “너는 사람과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라. 만일 갚을 것이 네게 없으면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 네가 어찌 그리하겠느냐”(잠언 22:26~27)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과 동정심에 이끌리어 자초한 피해와 어려움이었다. 전에 부산의 B 목사님이 섬기는 개척교회에 교회에서도 쓰기에 부족한 헌금을 빌려달라는 교인이 있었다. 군용 천막 안에서 가내 공업의 작은 업체를 운영하면서 사업 자금이 떨어지면 담임 목회자를 자주 찾아와 난감하게 했다. 그는 목회자와 교회를 나쁘게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재정 상태의 열악함 때문에 간절히 부탁했던 것이다. 이럴 때마다 B 목사님은 지혜롭게 대처해 나갔다. 성경을 통해서 헌금의 올바른 사용을 가르쳤고, 차용해주지 못하는 안타
“선한 능력에 우리는 너무 잘 보호받고 있으며, 믿음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밤이나 낮이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또한, 매일의 새로운 날에 함께 하십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가 히틀러 시대에 감옥에서 사형 전에 약혼녀에게 보낸 시가 찬양되어 알려진다. “옛 것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어두운 날들의 무거운 짐은 여전히 우리를 누르지만, 오 주님, 내몰려 버린 우리의 영혼에게 주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을 주옵소서!” 후렴에 “그 선한 힘이 우릴 감싸시니 믿음으로 일어날 일 기대하네”라고 노래한다. 감옥에서 선한 능력으로 일하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일어날 일을 기대하고 있는 믿음의 눈이다. 이 시대 울타리 없는 감옥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사람과는 거리를 두고 만남이나 대화도 자유로이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다르신 주님의 선하신 능력의 손이 일하심을 믿고 잠잠히 주님을 바라보며 고대한다. 사도행전 16장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바울이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고친 후에 로마 사람들에게 매를 맞고 옥에 갇힌다. 밤을 지내고 옥문이 부서지고 간수와 그의 가족이 구원받고 난 후, 풀려나기 전에서야 자신이 “로마 사람”인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한복음 14:17). 원수가 있었습니다. 미워도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베드로전서 3:9)는 말씀을 머리로는 암송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으로는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 사람은 도저히 용서 못 하겠습니다”라고까지 할 정도로 마음을 좀처럼 추스르기가 힘들었습니다. 마치 요나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알면서도 도무지 순종하고 싶지 않아 자신이 하고 싶은 데로 행동했던 것처럼 전인적 부패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198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학을 다닐 때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아침에 학교를 등교하기 위해서 차를 타고 언덕을 넘어 내리막길 터널을 통과하는데 갑자기 자동차가 뱀처럼 자유자재로 달리기 시작하면서 한쪽으로 급격히 쏠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얼마나 두려운지 핸들을 똑바로 꽉 잡고, 속도를 서서히 늦추면서 터널을
설교자가 성서 문학 장르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성서 저자가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문학 장르의 차이와 관계없이 일반적인 성서해석의 대전제이다. 하지만, 본문 안에서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뜻을 찾아감에 있어, 그가 선택한 문학 형태를 고려하는 것은 보다 섬세한 저자의 저술 의도를 파악하는 데 필요하다. 왜냐하면 특정한 메시지를 특정한 문학 장르를 빌어 밝히고 있는 저자의 의도는 그 문학 형태의 특성 안에서 정확하게 파악될 것이기 때문이다. 21세기 성서적 설교는 효율적인 전달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이 시대의 청중에게 변함없는 진리의 말씀으로 증거하기 위한 과제를 부여받는다. 성서적 설교는 교회를 세우는 근간이며 복음 증거를 위한 중요 요소이다. 일반적으로 석의가 약하다고 지적되는 한국교회 설교는 보다 본문 해석에 근거한 본문 중심의 설교를 수행할 과제를 부여받는다. 성서적 설교를 위한 여러 관점 가운데 하나로서 성서의 문학 장르 특성에 따른 본문 해석은 매우 중요한 영역이다. 이번에 다룰 구약의 시편은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찬양이며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확신이다, 동시에 인간은 어떤 자
(qa,natoj kai. o` deu,teroj qa,natoj) 죽음은 인간에게 일어나는 가장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죽음은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바람 같은 존재이다. 장례식에 참여하는 사람 중에 조금만 현실에 놓여 있는 죽음에 대해 숙고해 본다면 죽음만큼이나 비밀스럽고 무서운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도 없다. 어제만 해도 유연하고 부드럽던 몸이 오늘은 돌덩이나 쇳덩이처럼 굳어 움직이지 않는 시체로 변해 있는 것을 무엇으로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가? 헬라인들은 순간적으로 닥친 죽음의 가면을 벗겨버리면 영원한 영혼의 자유가 있는 이데아의 세계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현인들은 죽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고 군인들은 전쟁에서 용맹스럽게 전사하는 것을 남자다운 행동으로 여겼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나타난 죽음에 낭만적인 요소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예수님이 죽음을 결단하고 맞이하는 모습과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완전히 상반된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다정한 친구처럼 여기고 살기 위하여 도주하는 것보다는 독물을 마시며 죽는 것을 선택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육체에 갇혀 있던 영혼이 해방되어 영원한 세계로 귀환한다는 헬라 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보배로운 피라고 해서 “보혈”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양이나 송아지의 피를 뿌려서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사람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양이나 송아지 같은 짐승이 대신 피를 흘리고 죽어야 했습니다. 짐승의 피를 뿌려서 죄를 용서받는 제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수도 없이 반복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한 대속제물이 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신대로 십자가에 달려 보배로운 피를 흘리시며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짐승의 피가 아닌 예수님의 보배로운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 맥아더 장군이 참호 속에서 어린 병사와 나눈 대화가 6월이면 더욱 생각이 난다. 후퇴하라는 명령이 없어 포탄 속에서도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나이 어린 병사에게 “집에 가고 싶지 않느냐?”, “부모님이 보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에 “다른 소원은 없고, 우리는 지금 맨 주먹으로 싸우고 있는데, 놈들의 전차와 대포를 까부술 수 있는 무기와 탄약을 주십시오.”라는 대답을 듣고 인천상륙작전을 결심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한인교회를 하는 많이 교회들이 미국인 교회 건물을 빌려 예배를 시작한다. 임대를 하던 무상으로 사용을 하던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대부분의 한인교회들이 현지 미국인 교회 건물을 사용하게 된다. 요사이는 빌려주지 않는 교회들도 있고 또 임대로도 내야 하는 곳이 있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쾌히 건물을 내어주고 함께 예배를 드린다. 해마다 6월이면, 미국에서 공부하며 한인교회목회를 할 때 함께 했던 미국인 교회들이 더욱 생각이 난다. 피부색도 인종도 다르고 처음 만난 사람들임에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는 것 때문에 좋은 교제를 나눴던 얼굴들을 잊을 수가 없다. 더욱 잊을 수 없는 것은 많은 미국인 교회들 안에 한국전이나 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