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금까지 ‘신약성서의 신학산책’을 진행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다루는 기독론에 관한 내용을 공관복음서와 바울서신과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살펴봤다.
이번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다루는 구원론에 관한 내용을 같은 순서로 진행하려고 한다.
먼저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구원론의 내용은 공생애 예수님의 중심적인 선포인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천국이 가까웠다”라는 말씀에서 간결하면서도 핵심적으로 제시됐다. 그래서 필자는 예수님의 이 선포를 중심으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구원을 “하나님의 나라/천국”이란 핵심적인 어구를 통해 살펴보려고 한다.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관한 요약적 진술에서 예수님의 선포의 중심적인 내용을 “하나님의 나라/천국”을 사용해 제시했다. 마가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한 마디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으로 규정하고 그 선포의 핵심적인 내용을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라고 제시했다.
마태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시작을 “이때로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라는 말씀으로 제시했다. 마태는 또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전체에 관한 요약적 진술에서도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은 한 마디로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다고 제시한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 4:23; 9:35). 마태는 나아가 예수님이 그의 열두 제자들을 내보내신 목적을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을 전도하게 하려는 것으로 제시한다(마 10:7).
누가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파하는 것으로 제시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눅 4:43). 누가는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요약적 진술에서도 그의 사역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그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제시한다(눅 8:1).
누가는 또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을 훈련하기 위해 내보내시는 목적을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셨다고 말한다(눅 9:2). 누가는 나아가 예수님이 70인 제자들을 따로 내보내신 목적도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웠다”는 것을 전도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눅 10:9, 11).
이와 같이 공관복음서 저자들에 따르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중심적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천국)가 가까웠다”라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 혹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이었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들과 말씀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관계된 것을 알 수 있다.
제자들을 부르신 것, 윤리적 교훈들, 율법의 해석과 적용을 둘러싼 논쟁들, 죄사함의 선언, 죄인들과의 식탁 교제, 오병이어 사건,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 등 예수님과 관계된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들이며 교훈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관한 선포의 맥락에서 이해돼야함을 보여준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셨는가?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관한 이해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가 된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특히 마태가 즐겨 사용한 어구인 ‘하늘나라(천국)’와 관련해 전통적이며 대중적 이해가 형성되어 있다.
요한복음 14장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질 궁극적 구원이 “내 아버지의 집에 있는 거할 곳”(요 14:1)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천국)를 ‘천당’과 연결해 생각하고 하나님의 나라(천국)를 그리스도인들이 장차 죽었을 때 들어가는 어떤 신비롭고 영광스러운 ‘장소’, ‘영역’, 혹은 ‘상태’로 이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나라(천국)을 미래적이며 장소적으로/영역적으로 이해하는 대중적 이해가 형성되어 있다. 많은 목사님들의 설교에서도 “여러분들은 지금 죽어도 천국에 들어감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이 성도들이 가진 구원의 확신과 관련해 자주 제시되곤 한다. 이런 질문에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관한 미래적이며 장소적인 이해가 전제되어 있다. 대중적으로는, 천국과 관계된 여러 가지 황홀한 광경에 대한 설명들이 “내가 본 천국” 혹은 “천국에 갔다 온 체험”과 같은 간증을 통해 제시되곤 했다.
이러한 대중적 이해는 하나님의 나라(천국)를 그리스도인들이 궁극적으로 들어가게 될 구원의 완성으로서 미래적 희망의 요소로만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천국)가 이렇게 미래적 희망의 요소만으로 이뤄진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의 현재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아직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곳에는 단지 죽은 후에 들어가는 것인가? 하나님의 나라(천국)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의 현재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미래에 천국에 들어가기를 기대한다면, 현재의 삶에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대한 이러한 대중적 이해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근본적인 목적을 다음 두 가지로 가지게 만들었다.
첫째는 천당 신앙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죽어서 천당에 가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유명한 표어에 잘 표현되어 있다. 천당은 영원한 축복의 장소이지만 지옥은 영원한 형벌의 장소이다. 예수를 믿으면 영원한 심판을 받지 않고 영원한 축복을 받는다.
천당 신앙은 일제시대 신사 참배를 반대하면서 극심한 박해를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과 상급을 말씀하셨다: “금세에 있어…백배나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 “세상이 새롭게 되어…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29);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눅 16:22~23)
둘째는 기복 신앙이다. 예수 믿고 세상에서 풍성한 축복도 받고 죽어서 영생을 얻는 것이다. 이것은 삼박자 구원으로 잘 알려져 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2절). 예수 믿고 영혼이 거듭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평화와 기쁨을 누리며 세상에서도 건강하게 살며 범사가 잘되고 만사가 형통하는 축복을 받는 것이다.
예수 믿고 영혼이 잘되고 건강하며 범사가 잘되면 하나님의 최고의 축복을 받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런 신앙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영적으로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세상에서도 건강하게 만사형통의 축복을 받으며 사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이야말로 일석이조 혹은 일거양득의 신앙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내세의 영원한 삶만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는가? 우리는 그저 내세의 영원한 삶을 위하여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무관심과 무책임으로 일관하면서 그저 내세의 축복만을 바라고 살면 되는 것인가?
세상이 도덕-윤리적으로 타락하고 인간의 존엄성이 상실되고 거짓과 조작이 난무하고 무자비하고 강포한 세상이 되어도 천당을 바라보며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세상에 눈을 감고 무관심하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이렇게 삼박자 구원에서 가르치는 만사형통의 길인가?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교훈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막 8:34; 13:13; 마 10:37~39; 눅 14:26~27, 33).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대한 대중적이고 전통적 이해만 갖고 있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을 만나게 된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시하신 말씀인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혹은 천국이 가까웠다”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저기 보이지 않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장소가 우리 머리 위로 가까이 내려왔다는 말씀인가?
예수님은 또 “내가 하나님의 성령(손가락)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했느니라”(마 12:28; 눅 11:20)라고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예수님은 또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중에(안에) 있느니라”(눅 17:20~21)라고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중에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의 말씀인가? 예수님의 이런 말씀들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미래적이며 장소적인 의미 외에 또 다른 의미 곧 역동적이며 현재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