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앞두고 영글어 가는 가을풍경은 우리들 마음의 영원한 그리움의 그림이다. 그러한 행복한 풍경화 속에서 갑자기 48시간의 제한부 전쟁선포에 나라 전채가 검은 구름에 쌓여 “이땅을 전쟁 위기에서 구하소서” 교회마다 기도소리 하늘을 향하여 울려 퍼졌고 목함지뢰와 포격 도발로 야기된 남북간 대치로 긴장감이 흘렀을 때, 주님의 뜻은 어디에, 여러 가지로 번민 속에 평화를 위해 기도하던 남한 성도들의 기도에 응답을 주심에 감사드린다.여름의 꽃 7월에서 9월까지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는 3개월동안 꽃이 피고 지고를 반복하여 오랫동안 피기 때문에 “백일홍”이라고도 부른다. 나무껍질을 손으로 긁으면 잎이 움직이기 때문에 “간지럼나무”라고도 부른다. 이 꽃이 많은 곳은 논산과 강경 근처이기 때문에 침신대가 목동에 있을 때 교정 안에서도 여름이면 분홍색 백일홍 배롱나무를 잊을 수가 없다. 교정의 푸른 나무들과 푸른 잔디의 배경으로 그리움의 꽃이기도 하였다.새로 시작되는, 필리핀의료선교회 컨퍼런스 참석을 위해 오랜만에 고향의 땅을 밟게 되었다. 길가에 피어있는 배롱나무꽃이 핀 숙소는 논산교회 근처 갑동호수가의 아름다운 전경으로 모두 행복한 미소가 흘렀다. 이튿날 선교
9월 정기총회가 다가오면 총회를 비롯한, 주요 기관 목회자 및 이사, 이해 당사자와 의장단 후보자까지 첨예한 긴장관계를 가지게 된다. 유독 지난 몇 년간 총회와 침례교 주요 기관과의 갈등은 여전히 풀지 않는 숙제로 나타나고 있다.이번 제104차 회기에도 국내선교회와 침례신학대학교에 대한 조사위 구성과 발표, 이로 인한 반박과 불복, 갈등은 우리가 지난 몇 년간 지켜본 정기총회의 얼룩진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교단의 발전과 미래를 위해 부득이한 결의와 결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긴 쉽지 않다. 하지만 그 결의와 결정이 특정한 이들을 위한 또한 어떠한 보이지 않는 세력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마땅히 제고해야 할 사안이 아닐 수 없다.우리는 그동안 수많은 이들을 조사했고 그에 대한 대의원들의 판단을 존중했으며 무엇보다 의장단 선거를 통해 최종 결정을 내릴 적도 있다. 이것이 먼 미래 교단을 바라보는 후배들에게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기억되고 남게 될지 생각해 보게 된다. 그 논쟁의 중심에 또한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과 결정으로 인해 교단의 역사와 방향이 바뀐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발언 하나, 우리의 결정 하나가 더욱 신중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이번 제104차회기도
오늘날에 그리스도인들의 대하여 비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부르고 인정하고 있는가?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불러주는 것이 좋겠는가? 사람들은 우리를 부를 때 교회에 다닌다 하여 “교인”이라 부르기도 하고,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 하여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때로는 기독교의 신앙을 업신여기기 위하여 “예수쟁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그리고 인터넷에서는 기독교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없는 사람들이고, 사회적인 문제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아집이 심한 집단이라는 의미로 “개독” 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말을 볼 때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의 눈에 비쳐진 기독교가 이토록 부정적이었나를 생각해 보면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기독교인답게 살지 못했으면 이런 표현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한다. 우리 자신들은 어떤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하고 있는가? 세상 사람들이 어떤 호칭으로 우리를 부르든, 그 안에는 그 이름이 담긴 의미가 있을 것이다. “교인”이라고 부를 때는 단순히 교회만 다닌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 다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윤리적 기준을 갖고
한국의 기독교신학과 교회의 세속화로 인해 영적 침체가 가속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목회자를 양성하고 있는 신학교에서 조차 종교혼합주의가 팽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을 필요한 부분만 믿고 나머지는 믿지 않는 위험한 신학 사상이 지배되고 있다. 신앙고백과 판단의 근거는 무엇인가? 기독교는 계시된 말씀을 통해 모든 가치를 부여하며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자 애쓴다. 개혁주의 신학과 성경적 신학을 지향하는 교회들은 이성과 경험에 의한 판단의 위험성을 인식하며 계시된 말씀을 통한 끊임없는 확인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식이 로마에서 있었던 때의 일이다. 세계의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로마로 쏠려있었다. 같은 날 서울에서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모임에서 한국교회의 원로 목사라는 몇 사람의 회개 발표가 있었다. 그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곳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 두 사건을 보면 한국교회의 혼합주의 경향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세속화되어 타락한 기독교의 특색은 시류의 쉽게 휩쓸려 반응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세계를 종교적으로 이념화한 채 세상의 분위기와 눈길을 인식하며 쉽사리 혼합주의에 편승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서 자신의
최근에 부족한 사람이 칼럼집을 책으로 묶어 펴냈다. 책을 접한 최성열 평론가로부터 서평을 보내 오셨다. 원문을 요약형태로 조심스럽게 게재해 본다. 목회 경험을 틈틈이 신문에 기고한 내용들이다. 이 평론을 이렇게 게제 하는 것은 결코 자랑을 하려 함이 아니다. 이 서평을 읽고 혹 책을 읽고 싶어진 독자가 있어 책을 원하면 기꺼이 보내드리고 싶은 생각에서이다. 반종원 목사님의 칼럼과 목회의 글들을 모은 동행 30년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느낌을 적어본다. 반종원 목사님은 『동행 30년』에서 다섯 주제로 잡은 첫 번째 ‘삶과 신앙 사이’라는 주제로 ‘설교한 대로 살면 잘 사는 것’이라고 하면서 첫 서막을 연다. 그는 친구이신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기쁨, 의미, 가치라고 한다. 지하철에서 외판원으로부터 캐온 ‘희망’이라는 메시지와 만남, 비전, 어려운 일이 닥칠지라도 굵은 획을 그어가며 지켜온 요동하지 않는 인생을 책의 서문에 싣고서 아름다운 동행의 발걸음을 내디디셨다. 게다가 남이 변하는 것을 바라기보다 자신이 변화되는 모습 속에서 찾은 능력, 사람이 아름답게 사는 길은 생명의 끝이 사랑이라는 것이라고 한다. 그 안에는 다 닳아서 쇠갈고리가 된 호미처럼 나누는 사랑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8월이 되면 휴가의 신선한 꿈을 꾼다. 서랍 속의 해묵은 마음들을 정리하고 새로운 비전을 위하여 사각의 밀폐된 공간에서 광활한 하늘과 바다와 푸른 숲이 펼쳐진 자유의 쉼터를 동경하는 것은 사치라고 말할 순 없다. 테두리 안에서의 삶에서 어떤 낮선 정막 속으로 나홀로 주님과의 밀실이 있는 곳, 그러한 곳을 찾아 나사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우리교단에서도 수양관에서의 수련회 단체 세미나 등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기독교신문지상에서 만날 수 있다. 모두가 휴가를 휴가답게 신앙의 빈자리를 새롭게 충전하기 위함이기 때문에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휴가들인가 싶다. 울릉도는 동해바다에 수석처럼 외로이 떠 있는 섬처럼 아름다운 바위섬이다. 울릉도 근해의 독도 작은 바위섬으로 일본에서 그리도 탐을 내어 우리나라의 땅을 “독도는 우리땅”이라 외칠 수밖에 없게 골치를 아프게 하고 있다. 요즈음엔 도동 항구에 기항하는 배와 저동 항구에 기항하는 배가 나눠져 있다. 촛대바위를 지나 저동항에 들어서면 오랫동안 선실에서 멀미에 암울했던 사람들의 눈에 먼저 들어오는 저동교회의 현판은 이 섬이 기독교 섬이구나를 느끼게 한다.울릉도는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태고의 신비와
앞으로 20여일 뒤에는 교단의 새로운 지도자가 탄생한다. 현재까지 큰 변수가 없는 한 총회장 예비 후보로 등록한 이들이 대의원들의 현명한 판단이 이뤄질 것이다. 물론 일부 대의원 중에서는 ‘교단의 지도자가 이렇게 없냐?’ ‘뭔가 참신한 이가 출마하면 안 되나?’ 등의 의견을 내놓고 있지만 현재 총회 규약 상 제1부총회장을 지낸 이가 총회장 후보로 나설 수 있다는 점이 한계로 나타나는 상황이다. 교단 규약을 떠나서 3,100여 교회를 대표하는 총회 지도자는 무엇보다 교단 전체를 생각하고 교단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며 교단에 유익이 될 수 있는 정책과 사업, 교단의 문제를 객관적어로 판단하고 무엇보다 기도하는 지도자를 기대한다.그동안 우리는 수많은 교단 지도자들을 통해서 여러 공약들을 듣고 이를 지지하며 그렇게 교단을 이끌어 갈 것이라고 예상하고 기대했다. 하지만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협력보다는 갈등과 분쟁을 조장하고 내실을 기하는 총회 사업보다는 이벤트에 치중하며 자기만족을 주는 총회 업적을 치켜세우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무엇보다 협력 사역으로 상생해야 하는 총회와 기관들은 크고 작은 사안에 대해 이견차를 보이며 협력보다는 서로 간 반목하고 한쪽에서는 총회의
군목 시절의 이야기다. 한 번은 동계종합훈련을 마치고 복귀했더니 인사과 사병계가 군종병 신병이 하나 왔다고 알려주었다. 부대가 훈련 중이어서 근무소대 내무반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누군지 궁금해서 내무반으로 찾아갔더니 신병답게 내무반 침상 끝에 차렷 자세로 앉아 있었다. 맞은 편 침상에 앉아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신병 뒤 침상 안쪽에 앉아 있던 상병 하나가 나를 보며 손을 가로로 마구 휘저으며 소리 없는 입모양으로 ‘얘는 안 돼요’라는 말을 인상을 쓰며 거듭 말하는 것이었다. 그 옆에 있던 다른 병사마저 덩달아 같은 사인을 보냈다.내무반에서 나온 다음 그 상병을 불러 군종병으로 왜 안 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그 친구 왈 “제가요 이것저것 물어봤거든요. 그런데 애가 술 담배도 하고 순 날나리예요.”라는 것이었다. 그 신병은 술 담배를 해도 문제가 안 되는 학교 출신이었는데 그 상병은 술 담배를 하는 것을 보니 순 나이롱 신학생으로 보였던 모양이었고 그런 사람이 군종병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상병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다. 그 때 나는 술 담배 문제가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신실한 신자인지 나이롱 신자인지를 구분하는 잣대로
오늘날 나이는 유동적이다 못해 혼란스러운 것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인생의 각 단계를 “유아기, 유년기, 청소년기, 청년기, 중년기, 은퇴기, 노년기, 그리고 황혼기”에 이르는 단계가 명확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단계의 구분이 불분명해 지고 나이가 갖는 의미는 더욱 모호해졌다. 예전에는 은퇴기에 해당됐던 60대를 신(新)중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성형수술도 나이에 대한 혼란을 가중시키는 데 크게 한 몫을 하고 있다. 엄마와 딸이 마트에서 장을 보면 누가 부모이고 누가 자녀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또한 첨단의학기술은 생명을 무한정 연장시키는 것도 가능하게 하고 있다.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 (Ray Kurzweil)은 20여년 후에는 인류가 100세를 넘어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모털’(amortals)족나이에 대한 개념과 정의를 가장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바로 나이를 잊고 사는 사람들의 수가 크게 그리고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의 행동이 나이에 어울리는 것인지에 대해서 별로 의문을 갖지 않는다. 나이에 관계없이 옷을 입고, 꿈과 계획을 세우고, 새로운 제품이 나오면 가장 먼저 써보고 싶
교회성장이 둔화되고 있는 가운데 영적 성장의 침체와 더불어 교회부흥의 어두운 미래가 예상된다. 적잖은 목회자들과 교회의 중직자들은 이 문제로 고민하며 괴로워하는 것이 현재의 현실이다.어떤 영역에서나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에는 장애물이 있기 마련이다. 교회성장이라는 고지에 도달하는 데에도 적잖은 장애물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장애물을 무사히 통과한 자 만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장애물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장애물의 정체성에 대해 면밀히 연구하고 대처해야 할 것이다.교회성장을 방해하는 장애물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첫째는 심리적 장애물이다. 교회성장의 가장 큰 장애물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무엇보다 숫자에 대한 고정적인 생각이다. 숫자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내적 관계만이 중요하다는 태도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숫자는 단순한 숫자 이상의 구원받은 영혼임을 명심해야 한다. 작은 교회가 최선이라면 극단적으로 말해 가장 좋은 교회는 한 사람이 모이는 교회일 것이다. 크던지 작던지 교회의 사이즈가 문제가 아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대해 얼마나 헌신하는 것이 이슈의 초점이 돼야 한다. 잃어버린 한 영혼이 돌아오는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