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얼마나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면 복수의 기도를 드렸을까요? 다윗의 복수의 기도는 여러 편이 있습니다. 살다 보면 얼마나 많이 억울한 일을 당합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복수는 더욱 강력합니다. 인간의 복수는 미워하는 자를 벌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복수는 미워하는 자뿐만 아니라 자자손손 벌할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에게 죄를 짓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의 삼대, 사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릴 것이다”(출 20:5, 새번역). 그렇다면, 다윗의 복수의 기도는 정당한가요? 여러분의 복수의 기도는 정당합니까? 하지만 어떻게 이런 식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까? 여기에서는 거름보다 더 심한 악취가 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복수보다 더 끔찍하지 않습니까? 믿음은 세상을 이긴다고 합니다(요일 5:4). 이런 식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세상은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다윗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하나님의 사랑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는 다르게 그의 사랑은 변화와 변조의 아들이었습니다. 다윗은 아마도 그의 원수를 미워하는 방법을 잘 압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고 나서도 아담과 하와는 죽지 않았습니다. 뱀의 말이 일부는 맞은 셈이죠. 하지만 더 지혜로워지리라는 기대는 깨지고 말았습니다. 눈이 밝아진 건 사실이지만 세상 이치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먼저 보였으니까요. 하나님 섭리를 벗어난 존재가 얼마나 초라한지를 그제야 비로소 깨닫게 됐죠. 꿈꾸던 욕망 속 근사하고 우월한 존재가 아니라 한심하고 신뢰 없는 열등함만 서로에게서 보고 말았던 겁니다. 2장 25절에서는 전혀 부끄럽지 않았던 벗은 모습이 이제는 감추고 싶은 실체가 되어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몸을 가릴 수밖에 없었고요. 벌거벗었지만 부끄럽지 않았던 과거에는 완전한 연합이 가능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연합할 수 있었고 사람과 자연, 사람과 하나님 연합도 가능했죠. 에덴동산이 낙원이 될 수 있던 원인이기도 합니다. 모든 존재가 부끄러움도 속임도 오만함도 없이 하나님 안에서 소통하고 연합할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 연합은 사라졌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벗은 몸을 감추며 자신을 숨겼고 사람과 사람, 하나님과 사람 사이 연합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
전국, 아니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개척하고 1년이 못 되어 이 난리가 났으니 그야말로 코로나와 함께하는 개척이었다. 정부 방침에 따라 온라인과 오프라인 예배를 반복적으로 전환하며 버티고 버틴다. 부활주일. 우리 교회 창립 주일이다. 상황이 조금 좋아져 기대하는 마음으로 현장예배를 준비하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온다. “좋은나무교회 목사님이시죠? 내일 예배 현장에 잠시 방문하겠습니다.” 공무원 방문 사전 예고. 전화기 너머 들리는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내게는 차갑게만 느껴진다. 공간이 좁아 ‘거리두기’가 어려워 온라인 예배에 늘 적극적이던 우리 교회. 성도님들의 지지가 있어 무리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부활주일에는 성도들을 직접 만나 위로하고 격려하고 싶은 마음에 오랜만에 현장 예배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공무원 전화 한 통에 마음이 무겁다. “전체 좌석이 얼마나 되나요? 20퍼센트, 아시죠?” 두 명의 방문 공무원 중 조금 더 어려 보이는 분의 똑 부러지는 목소리가 나를 곤란하게 한다. 있는 의자, 없는 의자 다 깔아 둔 내 꼴이 우스워 보인다. 꾸중을 면해보려는 엄마 앞의 아이 꼴이다. 하지만 선임으로 보이는 공무원이 몹시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기적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에, 이것은 오히려 또 하나의 고통입니다. 주변 세계가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거나 조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가장 기본적인 생필품 때문에 고통당할 때,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오, 그는 아무 도움이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어차피 그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런 식으로 아무런 도움 없이 있지 않았나요? 어차피 전능하신 분께서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분은 극한의 상황에서 40일을 주리시면서 일부러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이나 사도의 삶은 말 그대로 가장 기본적인 생필품과 관련해 고통당하고 있는 그런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그렇게 이 지상에서 주리셨습니다. 한 마디로, 그 분은 거지꼴을 하고 다니셨습니다. 세상의 주인되신 분께서 말입니다. 그때 아마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고, 아마 아닐 수 있습니다. 기적, 이것은 끔찍한 고문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보십시오. 이것은 고문입니다! 인간이 실제로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라는 무한한 뜻을 위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 때 하
그리스도의 시험은 그냥 평범한 인간적인 시험이 아닙니다. 배가 고플 때, 기적을 행하는 것을 우리는 대단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배가 고플 때, 단지 다섯 개의 떡과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한 것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이것은 믿을 수 없다고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시험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40일을 주리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일 수 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때, 마귀는 40일을 굶으셨던 주님께 이 돌들로 떡 덩이가 되게 하라고 시험합니다. 주님은 ‘기적’을 만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지 않나요? 하지만 그런 주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그 순간에 기적의 힘을 이용해 떡을 만들 수 있는 힘이 있음에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것, 이것은 얼마나 초인적인 고통입니까? 그런데도 주님께서 왜 기적을 사용하지 않았는지 깊이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까? 여러분은 주님이 작은 떡덩이로 5000명을 먹이는 기적을 믿지 않나요? 그런데도, 40일을 주리셨던 주님은 기적을
뱀은 에덴동산 동물 중에서 가장 간교하다고 표현될 만큼 영리하면서도 자기 의도를 관철해내는 능력이 출중했고, 간교한 꼬임에 하와가 걸려들었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책임이 뱀에게만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정말 그랬다면 하나님이 뱀에게만 벌을 내리셨겠죠. 뱀의 유혹을 문제 삼기 이전에 사람 마음이 어땠는지도 살펴봐야 합니다. 애당초 이 나무가 아담과 하와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졌을지부터 짚어보겠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하나님처럼 전능한 존재가 아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형상은 비슷할지 몰라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창조 능력만큼은 절대 따라갈 수 없었으니까요. 이들이 맡은 역할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관리하는 일뿐이었지만 세상에 쉽기만 한 일이 있을 리 없죠. 많은 동물을 관리하기 위해, 서로 달랐던 아담과 하와가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창조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 무엇이 가장 필요했을까요? 그것은 지혜였을 겁니다. 안타깝게도 지혜를 얻기가 쉽지 않았는데, 유독 동산 중앙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우뚝 서 있었던 겁니다.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그 열매를 절대 먹어서는 안 되며
에덴동산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동산 중심에 있던 두 나무부터 정리하겠습니다. 앞선 2장 9절에는 에덴동산 여러 나무 가운데 특별했던 두 나무가 언급되어 있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2:9, 개역개정)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특별하게 언급된 이유는 이후에 벌어질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인데요, 동산의 한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은 이 나무들이 그만큼 중요함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아담과 하와에게도 중요한 나무로 생각되었겠죠. 문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부터 시작됐습니다. 에덴의 모든 소산을 허락해주셨던 하나님이 하필이면 이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말도록 말씀하셨기 때문이죠. 수많은 나무 중 단 한 그루에 불과했지만, 결과적으로 비극의 시초가 되고 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 개역개정) 에덴동산은 완전한 자유의 세계였습니다. 삶에 필
‘덕스럽게 하자!’ 담임목사님 방에서 나오며 혼자 중얼거려 본다. 개척 계획과 사임 시기를 의논하며 조금 미루기로 결정했다. 교회 내부 사정과 담임목사님의 안식년 문제로 그리하기로 했다. 물론 고집부리며 사임하고 개척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는 신호를 주시지 않았는데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모든 것을 덕스럽게 하자며 마음을 다독여 본다. 결과적으로는 계획보다 많이 미뤘졌지만 괜찮다. 좋아하는 목사님 곁에서 행복한 부목사로 살았으니 이 정도 욕구는 잠시 접을 수 있다. 급히 사임하지 않고 부목사로 사역하며 개척을 준비할 시간을 배려받은 것은 득이 됐다. 쫓기지 않고 기도하며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워볼 수 있고 다른 교회 사례를 살펴보며 탐방도 하고 차근히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다. 여유롭게 교회 개척을 주변에 알리며 기도와 후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큰 힘이 됐다. 개척 시기를 연기시킨 것은, 하나님의 큰 그림이었을까? 담임 목사님의 배려였을까? “만화책 좀 채워주세요.” 마음먹었던 ‘만화방 교회’ 프로젝트를 지인들과 공유하며 후원을 요청했다. 누군가에게는 황당한 이야기였겠지만 간절했던 나의 마음이 전달됐나 보다. 지인들을 통해 크고
책을 읽는데 자꾸 글자가 흐리게 보입니다. 눈이 쉽게 피로해지고 두통도 생깁니다. 오히려 멀리 있는 것이 더 잘 보입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노안” 입니다. 이제는 아내가 챙겨주지 않아도 루테인을 찾아 먹게 됩니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세상이라고 눈감고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반드시 눈약을 찾아 먹는 나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잘 보고 싶어서 그럽니까? 이 책의 저자는 목회자와 그리스도인이 지켜내야 할 본질, 성경대로 사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시대를 읽는 눈이라고 말합니다. 시대를 읽고 시대에 맞는 성경의 적용과 행동이 없다면 시대와 세대를 넘어 가치를 인정받는 클래식의 성경을 낡고 처지 곤란한 올드한 성경으로 만드는 것임을 이야기합니다. 저자는 13가지 현시대의 주제로 우리의 삶을 통찰력 있게 볼 수 있도록 시대의 안경을 제공하고 본질과 허상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줍니다. “시대를 읽는다”는 것은 낡은 지도와 같은 생각들과 지식들을 과감하게 버리고 분명한 목적에 따른 새로운 지도, 즉 새로운 시대에 대한 살아갈 지식을 겸비하라는 것입니다. 낡은 지도는 우리가 가는 길에 혼란만을 가중시키고 방황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말할 수 없는 시
“목사가 나타났다!” 어느 동네, 개척교회 목사님이 길을 걸었다. 거리에 있던 상가 주인들이 속닥이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 광경이 좀 익숙한데. 맞다! 밤에 자다가 이상한 소리가 나서 불을 켰더니 급하게 숨어버리는 바퀴벌레? 미안한 표현이지만 딱 그 모습이다. 목사님이 나타나자 홍해가 갈라지듯 사람들이 피하기 시작했다. 그 목사님은 그런 능력의 종이었다. 홍해 앞에 있던 그 백성처럼 내게 이 경험은 큰 충격이었다. ‘어떻게 하면 동네 사람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개척을 준비하며 가장 큰 고민이다. 어느 동네에서 목격했던 한 목사님의 모습이 내게는 큰 아픔으로 다가왔다. ‘지역 주민과 접촉이 있어야 한다. 동네에 교회가 유익해야 한다.’ 내 깊은 고민을 듣던 스승님이 한 마디 던지셨다. “만화 어떠니?” 철학박사요, 여러 권의 책을 내신 분이 내게 ‘만화’를 권하셨다. 역시 스승님은 내 수준을 정확히 보셨다. 지역마다 좋은 인문학 서적으로 채워진 작은 도서관이 많다. 하지만 생각만큼 사람들 방문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대중들에게 인문학의 벽은 여전히 높았던 것이다. ‘그래, 어차피 나가는 월세. 만화방 만들어서 동네 사랑방이 되어보자.’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개역개정) 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겠다.(창2:18, 새번역) 9절과 16, 17절에 3장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중심축인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잠시 후 집중적으로 이야기하게 되니 잠시만 미뤄두도록 하죠. 1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남자가 혼자 살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자신이 만든 세계에 ‘좋지 않다’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합니다. 이제껏 하나님이 하신 일들은 모두 좋기만 했습니다. 그만큼 완벽하게 설계하고 빈틈없이 완성하셨기 때문이죠. 그런데 2장 7절에서 창조된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표현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짝을 만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굳이 독신자에 대한 반대 견해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생각할 이유도 없죠. 앞서 확인했듯이 창조가 완벽한 계획에 따라 단계적으로 이뤄졌다면 혼자 사는 생활도 섭리 일부로 보는 것이 옳거든요. 좋지 않다는 표현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자기 부인(self-denial)을 강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자기를 부인하면서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기독교가 점점 더 성장하고 현대로 오면서 이런 경향은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이자 심리치료사인 유진 드류만은 기독교 전통의 핵심적인 개념인 자기 부인을 “마조히즘적 자기 부인”으로 보고 이런 기독교를 자기 혐오, 자기학대, 심지어 가정학대를 정당화할 여지를 남겼다고 비판합니다. 한편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는 기독교의 핵심가치는 유지하면서도 이것이 마치 자아실현에 도움을 준다는 새로운 변화도 있었습니다. 김규보는 “거짓 자기, 참 자기, 자기 부인: 대상관계 이론을 통한 기독교 자기부인 고찰”이라는 그의 논문에서, 기독교 영성의 자기 부인의 이상이 자기애로, 자기애가 자기 문화로, 자기 문화가 자기 극복으로, 마침내 자아실현으로 옮겨갔다고 비판했던 부룩스 홀리필드(E. Brooks Holifield)의 말을 인용합니다. 필자는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의 자기 부인이 결국 자아실현에 봉사하는 처지로 전락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교회가 더 이상 자기를 부인하는 삶의 가치를 강조하려 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단어가 미처 다 이해되기도 전에 세상은 너무 빨리 변화하고 있다. AI의 혁명, 첨단과학의 시대, 자동화 시대 등 이 시대를 칭하는 많은 용어는 우리를 당황하게 하고 때로는 혼란스럽게도 한다. 기계가 사람의 일을 대체하는 것을 넘어 이제 기계가 사람을 통제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대두되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것은 편리함과 예측 불가능한 변화라는 양날의 칼을 마주하며 사는 것 같다. 설상가상으로 오랜 시간 지속된 팬데믹은 사람들을 더욱 고립시키고 서로 마주 보고 눈을 맞추며 소통하는 일상을 마비시켰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인간을 매우 고독한 존재로 만들고 있다. 우리는 편리함이 주는 부작용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편리함의 중독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순된 상황에 속절없이 밀려가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 같다. 혼자서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현실과 유사한 비현실에서 방황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뉴스가 이제는 낯선 일이 아니다. 미래를 향한 꿈과 비전으로 가장 빛나야 하는 젊음이 기계의 통제와 가상 공간이라는 인위적 환경에서 시름시름 시들어 가고 있다. 어쩌면 일부 특정한 사람뿐 아니라 우리가 모두 예전에 경험하지 못한 불안감과 외로
2장 7절에 나오는 사람 창조 이야기는 1장 27절보다 훨씬 자세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창조를 따로 설명하고(여자의 창조는 20절 이후에 나옵니다) 흙을 이용해 신체를 만들고 생기를 불어넣는 과정이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죠. 반면 세분 하나님이 상의하시는 장면은 여기에서 볼 수 없네요.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이야기는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상식일지 모르나 비신자라면 굉장히 비과학적인 주장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흙이 사람이 되는 이야기는 너무 동화 같으니까요. 창세기는 왜 이렇게 비논리적으로 이야기하는 걸까요? 단순하게 사람이 본래 흙이었다는 정보만을 제시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흙은 땅이고, 땅은 곧 세상이죠. 따라서 이 구절은 먼저 창조된 세상의 바탕 위에 사람이 창조됐음을 지적하면서 사람이 하나님 피조물 가운데 하나에 불과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 형상을 가졌다고 해도 그분의 섭리에서 멀어진다면 무가치한 흙과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선언이기도 하죠. 이어질 에덴 사건에 대한 창세기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피조물이 창조자의 의도에서 벗어날 때 벌어지는 결과와 이를 가엾게 여긴 창조자의 은총을 이해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