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하게 잘 나가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넘어지는 경우가 있다. 대중의 존경을 한 몸에 받다가도 어느 한 순간, 사람도 지위도 다 잃는다. 과연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일까? 이유는 뭘까? 이에 나를 포함한 우리 모든 목회자들이 새겨볼 성경적 교훈들이 여기 있다. 첫째, 선줄로 생각해서이다.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성경도 분명히 말했다. 마치 모든 것을 이미 다 이룬 양 자만하거나, 이제는 모든 게 다 자기중심으로만 돌아갈 거라 착각하여, 겸손일랑은 아예 없고 교만하기만 하여 안하무인(眼下無人)인 사람은 언젠가는 그렇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니 내 각본대로 일이 너무 잘 돌아갈 때 조심하자. 나를 향한 말들이 칭찬일색일 때 더 낮추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잠16:18)임은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이다. 둘째, 경고를 잘 듣지 않아서이다. 아담과 하와도 그래서 넘어졌다(창3:2-6). 하나님 말씀은 무시하더니 사탄의 꼬임에는 잘도 넘어갔다. “죽는다”는 경고도 대수롭잖게 여기더니, “먹지말라”하시는 건 기어이 먹었다. 결국 그 일로 그 아름답고 풍요로운 곳에서도 쫓겨나버렸다.
Ⅲ. 목회자 독서의 신학적 이해 지도자는 책을 읽는 사람이다. 특히 뛰어난 영적 지도자는 지식과 품성, 비전에 있어서 남다른 사람으로, 그들은 대부분 책의 사람들이다. 지도자와 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특히 진리를 탐구하고 전하는 목회자에게는 더욱 그렇다. 세상에서 목회자만큼 책에 관심을 기울이고 책과 함께 해야 할 사명이 있는 사람들도 드물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성경책을 사랑하는 책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신앙 체계이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 계시 종교로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가르침 위에 세워진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성령님에 대해, 교회에 대해, 그리고 기독교의 신앙 내용과 행습에 대한 진리를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성경 없는 기독교 신앙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기독교는 책의 종교이다. ‘책’을 뜻하는 그리스어 비블리온(biblion)은 ‘파피루스’라는 뜻을 지닌 비블로스(biblos)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성서라는 ‘바이블(bible)’이 이 말에서 생겼다. 이처럼 성경을 바탕으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영적 지도자가 목회자이다. 그러므로 목회자 독서의 신학적 이해
톰 라이트(N. T. Wright)도 던과 같이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를 수용해 개신교의 전통적인 해석을 거부하면서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를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은 ‘이신칭의’를 바울 복음의 중심으로 해석했으나 라이트는 바울의 이신칭의 구원론의 중요한 요소인 전가(imputation)의 가르침은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단해 이신칭의가 바울 복음의 본질적 요소임을 반대했다. 그래서 1세기 유대주의 관점에서 바울을 해석해야만 바울서신을 잘 이해할 수 있고 특히 ‘이신칭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라이트는 종교개혁자들의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해가 잘못됐다고 비판한다. ‘하나님의 의’를 추상적이고 무역사적인 헬라적 배경에서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잘못 해석했다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의’는 루터가 생각한 ‘전가된 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는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자신의 신실성이며 이스라엘을 구출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라고 한다. 또한 재판관의 판결에 따라 의롭게 되는 것인지를 첨가하거나 배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미래의 심판이 요청될 때 그들의 언약적 의무에 충실함을 반영하는
제가 섬기는 군인교회에서는 교육생 장병 형제들은 정해진 부대 중식시간에 맞춰 예배 후에 부대에 복귀해서 식사를 하지만, 간부들과 가족들, 민간신자들과 봉사자 형제들은 교회에서 준비한 점심식사를 함께 합니다. 그래서 예배가 끝난 다음에 식당 쪽으로는 길이 길게 서있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담임목사도 예외 없이 줄서서 뷔페 접시에 음식을 담아 식탁으로 가야하기 때문에 예배당에서 나오는 성도들과 일일이 인사를 하고 나면 줄 순서가 거의 끝번이 됩니다. 물론 제가 앉는 식탁 쪽에 앉는 분들은 제가 밥을 타서 앉아야 식사를 시작해야 할 것 같아 머뭇거리기 때문에, 성도들의 배려로 앞쪽으로 줄을 옮겨 먼저 밥을 타곤 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니까, 은혜롭게 예배 잘 드리고 난 후에 담임목사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새치기였습니다. 그래도 다들 상황이 상황인지라 배려를 해주고 양보해주는 은혜를 베풀어서 그렇게 해왔지만 상당히 껄끄러운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아예 식당 봉사하는 분들에게 밥을 먼저 떠 놓아달라고 부탁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부담스러운 것을 그냥 무시하고 지내는 것은 그리 지혜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2:1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목회자 독서는 부족한 면이 많이 있다. 좀 더 관심을 갖고 독서에 매진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강영안은 목회자를 상대로 인문학 강의를 할 때마다 목회자들이 너무 책을 안 읽는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 기독교의 고전으로 꼽히는 고백록도 제대로 읽은 이는 10명 중 1~2명이나 될까라고 생각할 정도로 책 읽기에 무관심하다. 이렇게 목회자 독서에 관한 부정적인 현실은 시대적으로 우려할 만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분명한 사실은 목회자들이 좀 더 독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만은 명확하다. 연구자는 책과 책 읽는 것에 대해 어린 시절부터 상당한 관심을 가져왔다. 특별히 목회자가 되면서부터 점점 더 책의 중요성과 책 읽는 것의 소중함을 체득하게 됐다. 책에 대한 서평이나 광고가 있으면 거의 다 읽어보고 독서에 대한 방법이나 유익한 자료가 있으면 찾아보고 확보하려고 애써왔다. 신기한 것은 책이 어떻게 생겼든지 어떤 환경에 처해 있든지 무슨 냄새를 풍기는지에 상관없이 책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고 있노라면 빼곡하게 쓰여 있는 글씨들이 알려주는 신선한 세계는 무한한 희망과 용기를 제공한다. 또한 무지는
샌더스는 더 나아가 갈라디아서의 중심 주제는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구원론이 아니고 오히려 이방인들이 어떻게 언약 관계 안에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사회적이고 공동체적 문제로 봤다. 루터는 ‘의로움’을 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무죄의 선언으로 이해했지만 샌더스는 갈라디아서 3:28을 예로 들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한 인격이 되었다고 본다. 즉 샌더스는 갈라디아서에서 제시된 바울의 칭의 교리는 이방인이 어떤 조건으로 언약백성에 참여하는가를 둘러싼 논쟁 가운데서 출연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율법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무너뜨린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의 장벽을 다시 세우는 것 때문이라고 했다. 샌더스는 바울의 진술에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을 심판 날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으로 해석한다. 죄인이 믿음으로 언약 공동체에 소속되고 율법에 따라 의롭게 삶으로 궁극적으로 종말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샌더스는 ‘율법의 행위’란 할례, 음식법, 절기법을 준수하는 행위들을
어느 나라나 가장 변하기 어려운 부서가 세 곳인데 교육계와 법조계 그리고 종교계라고 합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가장 늦게까지 잘 변화되지 않는 곳이 종교계라고 합니다. 이 세 부서가 부패하면 그 나라는 미래가 없고 희망이 없습니다. 한 나라의 양심의 보루가 교육과 법과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곳이 썩는다고 해도 교육과 법과 종교인들이 양심적으로 행동하고 살아있다면 그 나라와 민족은 얼마든지 바람직하게 변화될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특히 종교야말로 한 나라의 양심을 가늠하는 바로미터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를 어떻습니까? 유다 왕국 20명의 왕 중에 히스기야, 요시야와 더불어 3대 성군으로 회자되는 여호사밧은 아합과의 연합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에 선견자 예후에게 정직한 충고를 받은 후에 철저하게 회개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 제2차 종교개혁을 시도합니다. 역대하 19:4에 보면 여호사밧 자신이 직접 유다 전역을 순회하며 율법 교육을 합니다. 최남단 도시인 브엘세바에서부터 가장 북쪽인 에브라임 산지까지 곳곳을 돌아보며 국민들에게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강권합니다. 왕이 친히 이렇게 한 것입니다. 누군가를 변화시킬려면 자신이 먼저 개혁되고 변화돼야만
고전(古典) ‘고전’은 옛 서식(書式), 옛 의식(儀式), 또는 옛 방식(方式)을 말하며, 책으로 말하자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만인에게 공감을 주는 불변의 가치를 지닌 것을 말한다. 문학, 철학, 신학 및 문화예술은 분야마다 고유한 고전을 가지고 있다. 상식적으로는 음악과 미술은 18세기 또는 19세기 초까지 활약한 베토벤과 모차르트, 반 고흐와 세잔느 등의 잘 알려진 작품을 고전이라 하고, 종교와 신학 분야의 고전으로는 독일의 수도사 토머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같은 신자의 생활지침과 장 칼뱅(Jean Calvin, 1509~64)의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같은 교의서(敎義書) 등이 있다. 칼뱅은 1536년, 바젤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루카니우스(Martinus Lucanius)라는 가명으로 ‘기독교강요’ 제1권을 출판한 이래 평생 동안 저술을 계속해서 그의 나이 50이 되던 1559년에는 라틴어 수정증보판을 내었고 이듬해에는 그의 모국어 프랑스어 판을 출판하기까지 했다. 이로 인해 칼뱅은 “책 한 권의 사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바꿔보자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행동한다.”로. 모든 위대한 성취는 행동하므로서 이뤄지고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 실행이 답이다(이만규) 지금 우리나라는 심각한 가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느 때보다도 장맛비가 간절히 필요합니다. 메마른 땅을 푹 적셔주는 비가 쏟아지기를 사모합니다. 열왕기상 16:29에 보면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 왕이 됐는데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30절). 그는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데려와 아내로 삼았는데 그녀는 바알을 숭배하는 자였습니다(31절). 또 아세라 상을 만들어 이전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했습니다(33절). 그래서 하나님은 디셉 사람 엘리야를 통해 아합에게 “하나님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고 예언을 하게 하셨습니다(34절). 그래서 가뭄이 온 것입니다. 사악한 이세벨은 아합을 꼬드겨서 이스라엘땅을 우상단지로 전락시키고 하나님의 종들을 죽이고 핍박했습니다(왕상 18:4, 13). 많은 날이 지나고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
우리는 사람의 성격을 말할 때 흔히 문학작품 속의 인물에 비교한다. 그 중 하나가 햄릿과 돈키호테이다. 햄릿은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W. Shakespeare,1564~1616)의 희곡(戱曲) ‘햄릿’의 주인공이며, 돈키호테는 스페인의 작가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1547~1616 )의 소설 이름이자 주인공이다. 햄릿은 지적이지만 유약하고 결단성이 없는 인물을 대표하고 돈키호테는 단순하고 과감한 행동주의자를 대표하는 이름이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은 어느 날 갑자기 부왕이 사망하는 비극에 직면한다. 왕비인 어머니는 부왕의 동생과 결혼하고 그에게 왕위를 넘겨준다. 햄릿은 꿈에 나타난 부왕으로부터 자신이 독살 당했으니 복수하라는 지시를 받지만 꿈을 의심하고 머뭇거리다가 숙부를 죽일 기회를 놓쳐버리고 만다. 햄릿은 복수는 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협을 느끼면서 이렇게 독백한다.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어느 쪽이 더 사나이다울까?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받고도 참고 견딜 것인가, 아니면 밀려드는 재앙을 힘으로 막고 싸워 물리칠 것인가? 3막 1장에,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
아무리 설교를 잘 준비해서 설교해도 말씀대로 살려는 자세도 거의 없고, 연말 되면 임원도 서로 안 하려고 하고, 교회가 어느 정도 부흥되는가 싶으면 영적으로 병이 들어 우르르 쾅쾅 무너지고…. “(모세)가 모세의 장인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호밥)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주마 하신 곳으로 우리가 행진하나니 우리와 동행하자 그리하면 선대하리라 여호와께서 복을 내리리라 하셨느니라 호밥이 그에게 이르되 나는 가지 아니하고 내 고향 내 친족에게로 가리라 모세가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 당신은 우리가 (광야)에서 어떻게 진 칠지를 아나니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 우리와 동행하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대로 우리도 당신에게 행하리이다”(민10:29~32) 그러던 중 우연히 민수기 10장 29~32절를 읽으면서 저의 목회 심정을 그대로 묘사해 놓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됐습니다. 이 내용은 “모세가 처남인 호밥에게 하나님이 주마하신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가려고 하는데 함께 동행하며 이스라엘 백성의 눈이 되어 달라”고 하는 간곡한 부탁의 내용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하나님이 맡겨주신 이 성도들을 데리고 천
본 기고글은 침례신학대학교 목회신학대학원 목회신학 전공에서 박사학위(목회자를 위한 효과적인 독서전략)를 받은 최호준 목사의 논문을 기고문 형식을 재구성한 것이다. 목사를 비롯한 교회에서 성별된 직무를 담당하는 영적 지도자들을 목회자 또는 사역자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교회가 교회로서의 본분과 기능을 다하게 하기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다. 목회자는 신자가 신자 되고, 교인이 교인 되고, 제자가 제자 되고, 교회가 교회 되게 하기 위해 일하는 성별된 봉사자이다. 목회자는 앞장서서 모범과 솔선수범으로 양떼를 이끌고 나가는 인도자이다. 그리고 그는 교리적으로 윤리적으로 양들을 돌보고 보호해주는 보호자이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 회중에게 격려와 도전을 주고 능력을 받아 일하도록 직분을 수여하며 뭔가 일이 되도록 교회를 이끌어 나가는 부여자이다. 또한, 모든 신자들을 동역자로 생각하여 각자에게 있는 능력을 발휘하도록 준비시켜주는 구비자이다. 그리고 그는 가능성 있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고, 할 수 있는 사람들로 하게하며, 하고 있는 사람들로 계속하도록 하는 촉진자이다. 이렇게 막중한 책임과 역할이 주어진 목회자에게 하나 더 갖추어야 할 사역의 역할이
1826년부터 1860년대까지 튀빙겐에서 가르친 바우어(F.C. Baur)는 전통적인 견해를 받아들여 바울의 사상이 유대기독교와 갈등에서 나왔다고 했고 더 나아가 1880년대 초기 그리스도교를 종교사적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종교사학파는 바울 사상의 출처가 결정적으로 유대교가 아니라 헬라였다고 주장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이러한 종교사학파의 길을 따른 루돌프 불트만은 루터교 용어를 사용해 바울 사상을 나타내려고 했다. 그는 ‘개인’이 중심이었고 ‘칭의’(법정적 개념)는 바울신학의 중심으로 봤고 바울은 유대교와 정반대였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불트만의 제자인 에른스트 케제만(Ernst Kasemann)도 ‘칭의’가 바울사상의 중심이라 강조했다. 윌리암 데이비드 데이비스는 ‘바울과 랍비 유대교’에서 바울은 유대교와 전혀 대적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사실상 거기에는 상당한 연속성이 있고, 또한 율법은 유대교에 부과되어 긍정적으로 역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바울은 자신의 새로운 믿음을 유대교의 성취로 간주했다. 유대교를 ‘율법과 순종(행위)의 종교’라 하여 바울의 기독교(‘믿음과 성령의 종교’)와 대조하는 것을 시대착오라 했다. 바울사상의 중심은 ‘이신칭의’
“나침반 바늘은 정확한 방향을 가리키기 전에 항상 흔들린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지금 흔들리고 있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언젠가는 바른 방향을 가리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달팽이 안에 달’에서 사람들에겐 다른 동물이 갖지 못한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기다림입니다. 혹시 지금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있다면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름대로 무언가를 기다리며 산다는 공통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기다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항상 기다림 속에 살고 있지 / 언젠가 내게 올 사람을 기다리고 / 고통과 아픔에게 벗어날 시간을 기다리고 / 폭풍같은 번뇌가 잔잔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 또 기다리지 … (중략) 현실이 고달프다고 포기해버린다면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리라 / 어렵게 얻은 것일수록 그 소중함은 더 크지 않더냐 / 내 인생에 혹독한 시련이 왔을 때 나는 사람보다 신에게 기댔다 / 신은 언제든지 다가가면 안아주고 마음껏 숨 쉬게 해주었지 / 걷고 또 걷고 그러다보면 시간은 저절로 흘러가리 / 또 다른 삶이 다가오리 또 다른 희망이 다가오리 - ‘꿈꾸는 원덕사’(장용숙)에서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4월말 진도의 축제 중 하나인 신비의 바닷길 축제가 있었다. 진도 본 섬과 모도라고 하는 작은 섬 사이 2.8km가 조수간만의 차이로 약 40m 폭으로 깊은 곳은 15m도 더 깊었던 바닷길이 열린다. 진도 전 주민의 축제라고 할 만큼 큰 행사로 진도 문화 행사와 바닷길을 걸으며 조개와 미역 등을 수확할 수 있고, 복이 있는 날엔 낙지도 잡을 수 있는 기회다. 한 해 5~60만 명의 인파들이 모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전설을 만들어 전설적 사건에 치중하는 행사가 됐다. 그런데 1993년 지자체에서 “현대판 모세의 기적 신비의 바닷길이 열리는 이곳에 멋과 흥을 펼칠 터전을 세우다”라고 적힌 기념석이 세워진 것을 보았다. 진도의 목회자가 되어 우상과 미신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섬 문화를 보며 눈물로 기도했는데, 그나마 성경의 용어를 이름하고 불려지도록 만들어 성경을 듣는 기회를 만들고 싶다. 비록 성경에 나오는 모세의 사건과는 전혀 다른 현상이지만 그것을 우상을 섬기는 일로 만들기보다 성경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면 훨씬 났지 않겠는가. 올 해 행사에 자원봉사자가 필요한 것을 알고, 부족하지만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찾아 신청했다. 그리고 외국인들을 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