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위인자자 출필고반필면”(夫爲人子者 出必告反必面)이라는 옛 교훈이 있다. 자식은 집을 나갈 때는 반드시 부모에게 고하고 돌아와서는 대면하고 인사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사람은 출입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교수 시절, 어느 여름 방학에 총장실에서 대학원 소속 교수 한 사람을 찾는다는 급한 전갈이 있었다. 대학원 조교들까지 동원해서 여기저기 수소문한 결과 뜻밖에도 그 교수는 해외에 나가 있었다. 교수들에게는 방학 동안에도 보충수업과 성적확인 기간이 있고 각종 위원회와 논문지도, 학생모집 등의 부가업무가 있어서 장기간 해외 채류는 불가능하며, 또 교직원은 해외에 나갈 때는 반드시 절차를 거쳐 대학에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 그가 무단 출국한 것은 대학과 학생들에게 불편을 주었을 뿐 아니라, 좋지 못한 선례까지 남기게 되었다. ‘출필고’ 하지 않은 불상사이다. 한 번은, 목회하는 친구가 선교지에 가야할 일이 생겼다면서 한 주간 동안 세 번의 설교를 부탁하기에 기꺼이 수락하고 친구의 교회에 가서 예배를 인도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돌아온 후에도 전화 한 번 하지 않았다. “우리 교회 와서 수고 많았어. 덕분에 잘 다녀왔네” 해야 마땅한 일 아닌가. ‘반필
죄 짐에 눌려 저주아래 소망 없이 살던 인생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고 천국을 소망하며 예수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90세 되시는 할머니 집사님이 60대 후반에 따님의 권유로 교회를 나가기 시작해서 처음에는 신앙생활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럭저럭 다니다가 말씀 듣는 귀가 열리면서 말씀에 은혜를 받고 저녁 기도회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나오시면서 이런 고백을 했다. “목사님 내가 예수님 믿지 않았다면 노년에 무슨 재미로 살았을까 싶습니다. 내 성격에 경로당에도 안다니고 방안에만 들어앉아 있다가 치매라도 걸렸을지 모를 텐데 예수님 믿고 우리 목사님 만나서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오늘은 무슨 말씀을 전하실까 궁금해서 교회 안 올수가 없어요. 힘들어도 오면 은혜 받고 힘이 나고 하루하루 사는 것이 즐겁고 행복합니다.”라고 했다. 할머니처럼 신앙생활은 기쁘고 행복해야한다. 노인도 젊은이도 예수 믿으면 즐겁고 행복해야하는 것은 복음은 기쁜 소식이기이기 때문이다. 성도들 중에는 행복하려고 시작한 신앙생활이 또 하나의 짐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내 힘으로 선을 행하여 의로워지려고 노력을 하면 할수록 힘이 들고 무거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17)” 어느 성도님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불신자인 남편이 자신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교회 다니면서 헌금이나 갖다 내고, 봉사도 하고,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는데 도대체 얻은 것이 뭐가 있소? 뭐 때문에 교회 다니는거요?”라고 하더랍니다. 도대체 열심히 교회 다니며 신앙생활 하면서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돈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일이라면 하나님 모르는 불신자들도 돈 많이 벌어 부자로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건강이라면 불신자들도 무병장수하여 오래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출세와 성공의 길이 열려서 좋은 대학 들어가고, 좋은 직장 구하고, 고속 승진 하는 것이라면 불신자들 속에서도 성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하는 핵심적인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다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고난을 통해서 크고, 강하게 자라 갑니다. 그래서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낸 후 홍해에서 침례식을 거행하신 다음, 그 후 부
하루를 지내다보면 가장 많이 오는 메일이 스팸메일이고 다음이 여행안내 메일입니다. 그것은 현대인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연휴가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쉼’을 위해 국내외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OECD국가 중에서 11년 연속 자살률이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하루 평균 40명이 자살하고 매 30분마다 한명씩 삶을 포기한다는 통계는 인간 스스로의 ‘쉼’의 한계가 무엇인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독교 복음에서 최우선적인 주님의 부르심은 “와서 쉬라”는 초청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주님위해 일하다가 지치고 때로는 병까지 얻기도 하며 낙심하고 불평하며 심지어 주님 곁을 떠나기도 합니다. 우리 주님은 “참된 평안과 쉼”을 위해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주님만이 어떤 경우와 처지에서도 결코 고갈되지 않는 무궁무진하신 참된 인격을 소유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삶에 지친 우리에게 평안과 쉼을 제공하시기 위해서 때와
Ⅰ. 들어가는 말 기독교 신앙은 실천적 특성을 가지며, 신앙과 실천은 상호 보완적 관계를 갖는다. 즉 신앙에 근거하지 않은 실천은 타당성과 일관성 그리고 지속성을 부여받지 못하며, 실천 없는 신앙은 관념적이고 무기력하며 그 진정성에 손상을 받는다. 한국 교회를 비롯하여 현대의 기독교는 실천성의 약화로 인해 영향력을 상실하고 오히려 사회적 부담과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물론 그동안 기독교가 실천을 몰랐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신앙의 실천성을 재확인하고 강조함으로 활력을 회복하고 능력과 영향력을 재정립해야 한다. 현대교회는 점점 전도적 열정과 동력을 상실해가고 있는 것 같다. 이에 한국침례교회는 지난 역사적 경험 속에 깃들어 있는 실천적 신앙의 유산들을 일깨워 새로운 부흥과 성장의 전환점을 마련해야 한다. 유재성은 바람직한 미래를 제시하면서 현재의 문제를 극복하도록 돕는 라이프웨이 상담법을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없는 것으로 직접 역사하기도 하시지만,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으로 크신 일을 이루신다.”고 언급하면서, 과거에서부터 역사해 오셨던 하나님의 흔적인 은혜의 사건들을 찾아내어 미래를 전망함으로 그 역사의 흐름에 동참하게 하기
내 인생 반백년에 과연 필요치 않은 경험이 하나라도 있었을까? 문득 생각해보았다. 몇몇 성공했던 경험들을 포함하여, 실패한 경험, 상처 받은 경험, 너무나 억울해 주저앉고 싶었던 경험들과 하나님과 나 자신과 가족들에게 부끄럽고 미안했던 경험들까지도 모두 합해서…. 결론은 아니었다. 그 모든 경험들은 다 내게 필요하였다. 성공한 경험들은 나를 자신감 있게 만들었고 당당하게 만들었다. 그 쌓여진 경험들로 인해 더 큰 것을 추진할 용기도 가질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내 존재감을 알리는 일에도 기여하였다. 참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실패 경험들 역시도 필요하였다. 나를 겸손하게 만들었고, 나의 한계도 깨닫는 소중한 기회들이었다. 하나님을 더 의지할 수 있었고, 나를 진지하게 돌아보게도 해주었다. 다른 사람의 입장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세상의 중심이 내가 아님도 깨닫게 해주었다. 경청과 배려, 양보와 이해, 수용과 용서를 학습하게 되었고, 기다림과 내려놓음, 생각의 정돈과 인격의 다듬어짐도 경험하게 되었다. 물론 아직도 일부는 진행형이지만…. 그렇다면 내 일생에 만나는 사람들 역시도 그러하리라. 우리의 만남에 어찌 우연이 있으랴. 필요하니 만나게 하신
그래서 전혀 새롭게 출발해야 했다. “의로운 해”(righteous Sun, 말 4:2)가 떠올라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야 했다.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하신 것이다. 태양이 중천에 떠오르면 밤의 어둠을 밝히던 야등들은 빛을 잃어 버린다. 구약의 야등들은 신약의 태양,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더 이상 빛을 발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유산으로 그리고 성령님의 강림하심으로, 이 지상에 교회가 비로소 출현한 것이다. 교회가 신약의 산물이라고 할 때, 구약성서보다는 신약성서에 우선적인 권위를 두고 교회론(ecclesiology)을 정립해야 신학적인 오류를 피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성서를 통하지 않고 곧바로 구약성서를 해석하기 때문에 많은 기독교적인 이단들이 발생하고 있다. 기독교는 기독(基督), 즉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이다. 그리스도는 구약성서에는 암시적으로 비유적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신약성서와 복음서들에는 이 땅에 성육신하신 그 분의 삶과 가르침이 생생하게 소개되고 있다.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Magisterial Reformers, 주류종교개혁가들, Mainstream
정말 가을이 왔습니다. 우리 앞에 어느새 성큼 다가와 우리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눈이 부시도록 파란 하늘과 마음까지 시원케 해주는 해맑은 바람이 우리의 고단했던 여름을 씻어줍니다. 어느새 자연도 사람도 모두 약속한 듯 옷을 갈아입고 우리를 맞이하고 손짓합니다. 가을은 영혼까지 넉넉하게 해주는 어머니의 가슴 같습니다. 가을은 말만 들어도 우리를 들뜨게 하고 부요케 해줍니다. 가르은 왠지 남자를 닮아서 크고 넓은 느낌을 줍니다. 가을은 추수의 계절이니 영적 추수를 하는 농부가 되고 싶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계절에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노래하고 그의 이름 앞에 찬미의 제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어느 시인이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 볼 이야기들이 있다”고 했듯이 우리도 자신에게 물어보겠습니까?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우리는 얼마나 보람있는 땀을 흘렸는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얼마나 사랑하고 감사했는지 지나온 발자취를 돌아볼 때 얼마나 사랑스러운 자국을 남겼으며 행복했노라고 그래고 고맙다고 춤추며 찬양드릴 수 있겠습니까? 가을을 사랑하는 어느 시인이 “이 가을에는 따뜻한 눈물을 배우고 빈 가슴을 소유하며 풋풋하 그리움 하나 품게 하소
시크교는 15세기 인도의 펀자브 지역에서 힌두교의 개혁파와 같은 성격으로 나타났다. 1885년에는 란지트 씽(Ranjit Singh)이 영국의 식민 지배를 거부하고 칼리스탄(시크왕국)을 건설할 목적으로 영국과 전쟁을 벌였으나 패배했고, 1984년에는 시크 교도들이 인도의 북부 도시 암(릿)사르의 황금사원을 점거하자 인디라 간디 수상이 ‘불루스타’라는 작전명으로 사원을 습격해서 시크 교도를 전멸한 사건이 있었다. 후에 간디 총리는 시크교도인 경호원에게 암살당했다. 1. 창시자와 교세 창시자 나나크(Guru Nanak,1469~1539)는 하급 카스트 출신의 힌두교 구루(스승)로서 카스트제도와 여성 차별, 명예살인 금지 등 사회개혁을 주창하고 나섰다.?그러나 1606년 무굴제국의 우호적인 왕 ‘악바르’가 죽고 ‘샤 자한’이 왕위를 계승한 후부터 심한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샤 자한’은 죽은 왕후를 기념하기 위해 22년(1631~53)에 걸쳐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웅장한 타지마할(Mumtaz Mahal) 궁전을 건축한 왕이기도 하다. 교세는 인도 국내에서는 인구의 2%인 2,500만 명 정도가 신도이며, 국외에는 영국, 캐나다, 미국 등지에 약간의 신도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과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고난과 그로 인한 고통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고난도 있지만 더러 어떤 것은 우리의 좁은 머리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둔한 입술로는 설명이 어려운 고통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고난과 시련이나 아픔을 우리 편에서 손쉽게 생각하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됩니다. 탈무드의 말처럼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서 10리를 가보기 전에는 그 사람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고난과 시련은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어떤 이는 믿음이 흔들리고 신앙이 식기도합니다. 그리고 “왜 나에게(why me)”라고 묻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그런 우리를 향하여 비아냥대기도 하고 대놓고 빈정거리면서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네 하나님이 왜 도와주지 않느냐”고 공격해 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난감하기도 하고 고통스러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고난과 고통의 문제를 바로 이해하고 대처해야겠습니다. 첫째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과 아픔이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가 나의 죄로 인한 대가와 결
-교리와 삶- 1) 소에 대한 경외심 : 원래는 암소, 하얀 소, 다리가 다섯 개인 오족우(五足牛)를 신성시 했으나 현재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모든 소를 신성시 한다. 2) 청결과 기도 : 청결을 중시해서 기도할 때마다 몸을 씻는다. 음식을 손으로 먹는 습관이 생긴 것은 수저 등이 불결할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3) 신도의 권리와 의무 (1) 권리로는, 덕행을 쌓을 권리, 재물을 소유할 권리, 삶을 즐길 권리, 삶을 초월해서 영적 승리를 얻을 권리 있고; (2)의무로는, 학생으로 배우고, 결혼해서 처자를 둔 가장이 되고, 가정과 일터를 떠나 구도자가 되고,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방랑자가 되는 것이다. 출가(出家) 주의 종교의 전형이다. 4) 화신(化身) 사상 베다의 주석 베단타(Vedanta)는 최고의 신 브라흐마와 풍요의 신 비슈누가 여러 번에 걸쳐 거북, 소 등 동물의 형태로, 또는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나타나 구원의 도리를 가르쳤다고 한다. 당나라 불교 천태종의 본산 국청사(國淸寺)에 아미타불, 보현보살, 문수보살이 풍간(豊干), 습득(拾得), 한산(寒山)으로 화신하여 은거했다는 ‘국청삼은(國淸三隱) 전설’을 연 하게 한다. 5)
-유래와 특징- 1. 유래 기원전 2,000년경 코카서스 일대에서 유일신 창조주 ‘브라흐마’(Brahma)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유목생활을 하던 아리안(Aryan) 족이 기도서 베다(Veda)를 가지고 동진해서 인더스 강 유역에서 자연 발생적 다신교 신앙을 가지고 있던 힌두교도들을 만났다. 아리안 족은 유일신을 섬기면서도 힌두교의 모든 신들을 수용하고 인도의 종교와 문화에 스스로 동화하였다. 일견, 브라만교가 힌두교에 흡수된 것 같지만 브라흐마는 힌두교의 모든 신들 위에 최고의 신이 되었다. 힌두교의 교세는 2,010년 기준으로 세계 인구의 15%에 해당하는 10억 3,300만 명이며, 수백 년에 걸쳐 세계 3대 종교인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세력권 아래에서도 교세가 꺾이지 않았고, 오히려 불교를 밀어내고 민족종교가 되었으며, 네팔에서는 국교가 되었고, 방글라데시, 발리, 말레이반도에서도 교세를 자랑한다. ‘힌두’라는 명칭은, ‘인더스’의 ‘산스크리트’어(梵語) ‘신두’(Sindhu)가 ‘힌두’(Hindu)로 발음되었다는 이론이 유력해 보인다. 2. 특징 1) 다신(多神) 사상 인도는 종교공화국이라 할 만큼 여러 종교의 발상지이며 신들이 많다. 그리스
일생을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막다른 길목에 서 있는 느낌을 받아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낙심하고 때로는 좌절하기도 하고 탄식하며 주저앉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리 주변에 그 누구의 도움의 손길도 없는 것 같은 혈혈단신의 고독함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경험은 해보지 않았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시편 142편은 다윗 왕이 이스라엘 왕이 되기 전에 이스라엘 초대왕인 사울 왕의 납득할 수 없는 부당한 살해 위협으로 도망자의 생활을 하는 중 이상 피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그의 답답한 처지를 토로한 시입니다. 다윗은 이 억울하고 절박한 순간을 진실하게 표현함으로서 인생의 막다른 길목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값진 진리와 가치를 배우게 해줍니다. 본 시는 막다른 길목 벼랑 끝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놀라운 자원이 있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막다른 길목 바로 그곳은 진심으로 기도해야 할 곳입니다. 최근 우리 주변에서 기도는 소리 내어 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하나님은 소리 내어 기도해야 들으시는가? 라며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갑
4. 이야기 설교 방식 경우에 따라 이야기 설교는 지나치게 신학적으로 자유스럽다거나 아니면 비성서적인 설교 방식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시각은 이야기 설교에 대한 이해 부족의 결과이다. 성서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통해서 진리를 전하고 있듯이 이야기 형식으로 설교를 한다는 것 또한 마땅히 하나의 설교 방식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구약의 족장들의 이야기이나, 예수님의 비유, 그리고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에 관한 본문은 이야기설교를 위한 자연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야기 본문만이 이야기 설교를 위한 절대 조건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이해되어 왔던 이야기 설교방식을 1980년대 들어서면서 독특한 방식으로 발전시킨 학자는 유진 로우리(Eugene Lowry) 이다. 그가 주장하는 내러티브 플랏 설교는 수사적으로 귀납적 형식을 띄면서 하나의 성경적 스토리를 문학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즉 성경에 소개되어 있는 일반적인 이야기들을 문학적 플랏 형식을 취함으로써 청중의 관심을 사로잡는 목적을 가진다. 로우리의 내러티브 플랏 설교 방식은 네 단계를 거치면서 진행되는데, 처음에는 청중에게 모순점을 제시하여
마니교는 ‘빛의 사도’를 자칭한 페르시아의 예언자 마니(Mani, 210?-276?)가 창시한 이원론적 종교이다. 마니교는 조로아스터교에서 파생된 종파였으나 비교적 분명한 교리와 체계화된 조직으로 고유한 종교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창시자와 교세 마니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중간 즉,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방에서 태어나서 24세 때 신의 계시를 받고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아브라함과 붓다와 예수와 조로아스터로 이어진 예언자 중 마지막 예언자라고 주장했다. 마니는 말년에 페르시아 황제로부터 “빛의 사도의 고통”이라고 불린 26일 간의 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죽었다. 마니의 사후에도 교세가 확장되어 북아프리카를 거쳐 4세기에는 로마와 스페인에 까지 교회가 세워졌고 기원 7세기에는 중국 황실에 선교단이 들어가 포교 활동을 허가 받았으며, 8세기에는 위구르의 국교로 채택하기도 했다. 그러나 9세기에는 중국에서 마교(魔敎)로 몰려서 종교 활동이 금지되었고, 10세기에는 사라센제국(Saracens) 아바스 왕조(Abbs, 750-1258)의 박해를 받아 교세가 크게 축소되었고 14세기 이후에는 지상에서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사라센’은 시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