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200만 성도와 5천 교회 운동에서 전도에 대한 이해목회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고 성도를 봉사하게 하고 교회를 사랑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주력하게 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전도하기를 명령하셨다(마 28:18~20). 교회는 영혼 구원에 최우선을 두고 전도해야 한다. 교회의 목적은 5가지가 있는데 예배, 전도, 교육, 봉사와 친교이다. 예배를 통해 풍성한 삶을 경험하고, 전도를 통해 주님의 사역을 확장하고 장려하며, 교육을 통해 신앙의 깊이를 더해가고, 봉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실행하는 방법들은 계절의 옷처럼 변할 수 있으나,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원리는 변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목회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성도들이 지역사회에 영향력을 미치고 강한 도전을 주는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1. 전도의 원동력 성령성경은 하나님의 구속 경륜의 실제성을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다(롬 8:29~30).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고,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의 아들을 보내주셨고, 죄에서 멸망하지 않도록 십자가를 통해 그의 사랑을 확
목회자의 기도를 받는다는 것. 어찌 보면 성도가 목회자를 너무 지나치게 의존하는 건 아닐까? 성도라면 누구든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기도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데, 굳이 목회자를 찾아가서 기도 받을 필요가 있을까? 혹 그 물음을 내게 묻는다면, 난 “있다”고 말하고 싶다. 다른 건 잘 모르겠다만 순전히 내 목회경험으로만 보면 “그렇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싶다. 벌써 십수년 전 해군의 군목으로 사역할 때다. 그 분은 대위였는데 사람이 그렇게 신실할 수가 없었다. 함정생활로 무척 피곤할 텐데도 정박하면 어김없이 새벽제단을 지켰다. 뿐만 아니라 제일 늦게까지 두 손 들고 기도하였다. 그런데도 그분은 또 내게 기도받기를 즐거워했다. 장기간 출동을 나갈 때면 꼭 목양실을 들른다. “목사님, 이번 출동도 잘 다녀오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알고 보면 뭐 특별한 기도제목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랬다.더 놀라운 건 기도 받을 때마다 꼭 무릎을 꿇으셨다. 그냥 맨바닥에 본인이 의자를 밀고서 앉으셨다. 그러니 내 기도가 어찌 간절하지 않을 수 있으리. 그분이 바로 지난 번 아덴만여명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해적에 생포된 우리 삼호 주얼리호 인질들을 무사히 구출해 낸 조영주 집
교회성장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은 한국교회를 축복하셔서 놀라운 성장을 주셨고 부흥케 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시며 구원의 기관으로 교회를 세우셨다(마 16:18).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한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교회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에 교회의 부흥은 온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한복판에 있기 때문이다.하나님은 한국교회를 축복하셨고 성장한 이후 1970년대와 1980년대까지 교회성장의 추세는 지속됐으나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교회성장이 둔화되기 시작했다. 한국교회는 1990년 중반부터 성장의 침체 현상이 시작되고 2000년부터 정체가 계속되고 있고 2002년 이후로 정체 현상을 통계로 볼 수 있다. 성령의 역사로 부흥하던 한국교회는 최근 20년 가까이 고원현상을 유지하고 있고 잘못하면 장기적인 침체기에 들어갈 수 있는 상황에 있다.정부의 통계는 그리스도인의 인구분포가 줄어든 실정이다. 그러나 한국인구의 43%는 아직도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다. 아직도 전도할 대상자들이 많은데 한국교회들이 미국교회가 쇠퇴하던 시기를 닮아 벌써 현상유지에 급급하고 있다.
영향력을 끼치는 리더가 되기 위해 가져야 할 중요한 두 가지 조건이 있다면 무엇일까? 또 우리가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들에게서 보기를 원하는 중요한 두 가지 덕목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리더로서의 성숙함을 말하며 이에 꼭 필요한 두 가지를 실력과 노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실력이란, ability라고 하며 노력이란, willingness라고 한다. 즉, 리더가 얼마나 할 수 있느냐는 실력과 얼마나 하고자 하느냐는 노력을 가리키는 것이다. 리더에게서 이 두 가지는 참으로 중요하다. 1. 실력리더의 실력은 때론 전문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리더로써 나아가야 할 방향, 그리고 상황에 따른 결정과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는 능력으로 리더십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는 것을 말한다. 리더의 능력은 리더로써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 받으며 사람들에게 따르기를 원하는 또 다른 카리스마가 된다. 그래서 리더의 실력은 따르는 자들에게 신뢰를 준다. 실력 없는 리더를 따를 때, 따르는 자들은 불안하고 비참해 질 수 밖에 없다. 실력이 없는 리더는 언젠가는 그 마지막이 드러나기 마련이며, 실력을 갖춘 리더는 언젠가는 분명히 빛나게 되어있다. 나는 리더로써 내게 맡겨진
찬양은 불러주시고 은혜주신 주님을 향하여 믿음을 고백하며 표현하는 것이다. 믿음을 고백하며 표현하는 방식에는 제한이 없다. 노래, 악기, 춤, 선행, 그림, 조각을 포함한 그 어떠한 방식도, 주님께서 주신 믿음을 고백하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면 모두 찬양이 될 수 있다. A. Nygren에 의하면 믿음의 핵심은 주님사랑이다. 찬양이 믿음의 고백이자 표현이고, 믿음은 주님사랑이므로 찬양은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며 표현하는 것이 된다. Wes. Sutton이 작사 작곡한 유명한 찬송가,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의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뵙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 되기 원합니다”는 주님께 고백하는 찬양자의 뜨거운 마음과 사랑을 잘 표현하고 있다. 단순하면서도 정갈한 이 찬송시가 로맨틱한 선율과 하나로 잘 엮어져서 주님과 영적으로 연애하는 분위기를 더욱 아름답게 승화시키고 있다. 평생에 걸쳐 찬양하며, 세상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주님께 사랑을 고백한 사람은 다윗이다. 그의 노래가 시편의 150개의 찬송시들 중에서 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이니, 시편에
사형은 제도적 살인이라고 주장하는 소리는 사형수의 생명권만 생각하고 살해당한 자의 인권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주장이라고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또한 정일웅 교수는 오히려 사형제를 존치함으로 생명의 귀중성에 대한 경각심과 교훈을 더하는 상징적인 의미는 분명히 있다고 강조했다.반면 구약학자 김정우 교수는 사형제도 존폐와 관련하여 신중론을 밝혔다. 김정우 교수는 모세의율법에서 의도적인 살인죄는 사형으로서 그 죄 값을 갚아야 하며 이 과정에 있어서 엄밀하고도 공정한 법적인 절차가 요구됐다며 이 모든 사형과 관련한 성경본문들은 사형제를 찬성한 것처럼 보이지만 구약의 법을 세속 문화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적용하는 것은 어렵다고 말했다. 또 김정우 교수는 성경은 인간이 만든 제도에 대해 하나의 답만을 주는 책은 아니기에 우리는 성경 안에서 존치론과 폐지론의 근거를 모두 다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교회사학자 이상규 교수는 사형제도에 대한 특별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으나 교부시대로부터 지금까지 교회는 사형제도를 인정하고 있음을 설명했다. 고신대 신원하 교수는 창세기 6장에 있는 노아의 홍수 본문을 사형제에 대한 성서적 근거로 보고 이 말씀이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마 25:15)우리는 흔히 많은 재능을 지닌 사람들을 가리켜 ‘달란트가 많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달란트를 각각 그 재능에 따라 주었다고 말씀하신다 즉 달란트는 재능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달란트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재능에 따라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라고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 ‘기회’라는 단어를 리더십에선 ‘변화(Change)와 도전(Challenge)’이라고 한다. 1. 변화(Change)사람들은 변화를 외치지만 변화는 싫어한다. 또 타인의 변화에는 적극적이지만 자신의 변화에는 소극적이다. 왜냐하면 변화의 필요가 있다고는 하지만 막상 그 변화가 우리를 불편하게 할 때 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변화할 때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야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더의 딜레마는 ‘그렇게 힘든 변화를 꼭 해야 하는가’에 있다. 하지만 변화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하나님이 주신 기회의 달란트를 놓고 우리가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훌륭했던 것도 아무리 아름다웠던 것도, 아무리 컸던 것도, 아무리 잘하던 것도 어느덧 화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기독교인 박해의 선봉에 서있었던 바리새파 유대인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극적으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복음전파자로 변화된 사건을 세 번이나 전달함으로써 사울의 체험과 변화의 중요성을 크게 부각시켰다. 사도행전 9장과 22장에서는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 혹은 “큰 빛”이 비취었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 체험과 함께 아나니아를 통해 부활의 주님을 다시 보는 영적인 눈이 열리는 내적인 변화의 요소가 강조됐다. 사도행전 26장에서는 그의 체험담이 로마 총독 베스도와 유다 왕 아그립바 그리고 여러 고관들이 배석한 법정에서 자기 자신을 변명하는 형태로 제시된다. 여기서도 그의 체험은 앞의 두 번의 묘사와 거의 유사하게 진행되지만, 한 가지 뚜렷하게 차이가 나는 점은 그에게 주시는 소명의 말씀이 아나니아를 통하지 않고 부활의 주님으로부터 그에게 직접 전달되는 부분이다.바울의 변명은 유다 왕으로서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알고 있는 아그립바 왕을 지목하여 그에게 자기 자신의 체험담을 말하는 형태로 제시된다. 바울은 그가 전에는 유대교의 가장 엄격한 분파인 바리새파의 생활을 했다는 것과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간절한 소망 때문에 그가 심문을 받
어느 초등학교 3학년 시험에 나온 문제란다. “다음의 설명을 읽고 생각나는 말을 적으시오. 결심한 것을 사흘도 넘기지 못하고 포기해버리는 것을 이르는 말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정답은 ‘작심삼일’이다. 선생님은 친절하게도 학생들을 위해 ‘작○삼○’이라고까지 적어두어 두 글자만 아이들이 채워놓도록 배려하였다. 덕분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정답을 잘 적어 넣었다. 하지만 한 아이만 유독 엉뚱한 답을 적었다. ‘작은삼촌’ … 채점하던 선생님은 결국 뒤집어졌다. 그 아이의 엽기적인 답은 또 이어졌다. 다음 문제는 “술에 취해 길거리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이르는 말은 무엇입니까?”라는 것이었다. 역시 정답은 ‘고성방가’이다. 선생님은 이번에도 힌트를 주신다. ‘○○○가’. 그래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답을 정확히 맞췄다. 하지만 그 아이는 또 한 번 엉뚱한 답으로 선생님을 웃기고 말았다. ‘아빠인가’.국어사전에 의하면 ‘정의’(正意/definition)란, ‘어떤 낱말의 의미를 규약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말의 정확한 뜻풀이는 더 없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그 말의 정의를 읽고 믿고 자신의 말과 행동을 기준 삼는다. 그런
(2) 구약 성경에서 사형에 대해 제일 먼저 언급된 부분은 하나님과 노아와의 언약 가운데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 창세기 9장 6절은 노아가 대홍수에서 살아남아 방주에서 나왔을 때 하나님이 내리신 명령이다. 존치론자들은 이 구절이 하나님께서 살인자에 대한 심판권을 인간에게 맡기시겠다는 의미로 본다. 곧 법적 재판과 형무관 제도를 시사하고 있는 구절로 해석한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타인의 생명을 파멸시키는 자는 하나님께 폭력을 가하는 자이기 때문에 살인자는 반드시 자기가 가한 대로 보응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총신대의 김정우 교수는 이에 대한 해석을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생명의 존엄성을 가르치기 위해, 살인자에 대해 법적 절차를 통한 사형제를 인준하셨다고 주장한다.(3) 출애굽기 21장 23-4절에 보면 모세의 율법을 근본 원리로 들어 사형제도의 타당성을 주장한다. 즉 구약의 동태보복법(lex talionis)이 현대 사회에서도 적용 가능한 정당한 법이라고 본다. 이런 근거들을 통해 십계명 가운데 2-6계명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명령으로 해석하며, 그 명령을 어겼을 경우 처벌은 반드시 사형이어야 한다고
비전은 미래를 향해 마음에 그려지는 그림(Mental Image for the Future)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비전을 주실 때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창 15:5)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네 자손을 많게 해 주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별들을 세어보라 하시며 하나님의 비전을 눈으로 보여(vision) 주신 것이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밤마다 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별들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으로 마음이 뜨거워졌을 것이다. 이같이 비전은 열정을 불러일으키며 사람들을 움직이며 변화를 가져온다. 1. 비전(Vision)비전에 대하여 영성리더십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바로 “이 비전이 누구로부터 온 비전인가?”라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인 꿈(야망)’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비전)’을 혼동하여 사용하고 있다. 비전의 출처가 비전과 야망을 구별한다. 야망은 만드는 것이고 비전은 받는 것이다. 야망은 자기를 위한 것이고 비전은 하나님이 주신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사무엘하6:21-22)”왕의 찬양하는 모습에서 왕의 체통을 깎아먹을 만한 것이 있었다며 자신의 남편을 비난했던 미갈을 향하여, 다윗이 당당하게 반론을 폈던 이 선포적 예언 속에서, 세 번째로, 진정한 찬양과 경배의 핵심은 ‘영적 집중력’에 있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갈릴리호수의 물위를 걷는 기적을 맛보았던 베드로가 오직 예수님께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면 그가 누렸던 기적의 시간은 더욱 길어졌을 것이다. 물위를 걸었던 그 짧은 시간은 베드로의 마음이 빈틈의 여지없이 온전히 주님께 집중하며 그와 하나가 되었던 순간이다. 완벽한 찬양의 순간도 이와 같다. 찬양받으실 주인공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찬양으로 나아가는 자는 찬양의 시간 동안 삼위일체 하나님만을 바라봐야 하고, 그분만을 마음에 담고 있어야 한다. ‘두 마음’을 품고 찬양하고자 하는 자는 찬양에 실패할 수밖
사형 존치론과 폐지론에 대한 기독교적 입장들을 살펴볼 때, 폐지론자들은 다음과 같은 성경적 근거를 말한다. 첫째, 사형 폐지론자들은 성서의 ‘살인하지 말라’(출 20:13)는 계명에 사형 폐지론의 정당성을 호소한다. 이러한 주장은 생명을 죽이고 살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 영역임을 명백히 하는 것이다. 사형제도 폐지 논의는 무엇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에 대한 존엄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둘째, 사형제도는 사랑의 계명에 어긋나기 때문에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 구약 성서를 통하여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명령과 계명은 ‘사랑’인데, 구약의 보복법을 근거로 사형을 찬성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보다 큰 하나님의 명령에 어긋난다는 주장이다. 셋째, 사형제도는 결국 그리스도의 대속 사건을 부정하기 때문에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어떤 죄인도 그의 십자가 아래서 속죄를 받을 기회와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형제도는 범죄자의 미래를 시간적으로 박탈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는 주장이다. 서양에서는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Voltaire, 1694~1778), 사형폐지론의 본격적인 시발점인 베카리아
리더는 무엇으로 사람을 움직이는가? 마키아밸리의 군주론을 보면 사자의 용맹함과 여우의 교활함으로 표현해 놓았다. 즉,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두려움을 갖게 만들고 이를 통해 사람들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하는 사자리더십과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였을 때 그에 합당한 보상을 약속하여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여우리더십인 것이다. 처세술에서는 이것을 “채찍”과 “당근”이라 하여 사람들을 이끌어 감에 있어서 사자 같은 두려움으로 아니면 여우같은 교활함으로, Push and Pull, 즉 밀고 당기는 리더십을 지닌 사람이 능력 있는 리더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영성리더는 질문한다. 예수님은 어떻게 사람들을 움직이셨는가? 우리는 예수님의 리더십을 살펴보면서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이 채찍과 당근을 주로 사용하셨는가?성경 속에 기록된 예수님의 리더십에는 채찍이나 당근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의 방문을 거부할 때(눅 9:53) 화가 난 제자들은 하늘에서 불을 내리기를 원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두려움으로 사람들의 믿음을 강요 하지 않으신다. 불을 내리셔서 하나님의 무서움을 보여주었다면 저들은 두려워서 주님을 더 따랐
먼 나라를 여행하는 일이 결코 좋지만은 않은 이유는 좁은 비행기를 장시간 불편하게 타야하고 기후나 음식 등이 잘 맞지 않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시차(時差)로 인한 적응의 어려움이 크다. 이번에 다녀온 남아공도 우리나라와는 7시간의 시차(時差)가 있다. 우리나라가 7시간 빠르다. 그러니 우리가 거기 도착한 오전 10시는 우리나라로는 오후 5시였던 것. 그건 그런대로 괜찮았다. 하지만 내가 강의를 시작한 시간은 그날 오후 4시, 우리나라로 치면 밤11시경이었다. 비행기 안에서도 거의 잠을 못 이루었음을 고려할 때 그 시간은 참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오죽하면 선교사님들에게 이런 농담까지도 했을까? “한국으로 치면 이제 저도 서서히 졸릴 시간이니, 혹 강의하다 헛소릴 하더라도 이해해주십시오.” 하지만 다행히 정신을 바짝 차린 탓에 강의는 은혜롭게 잘 마칠 수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남아공에서의 열흘은 오전엔 멀쩡, 오후는 헤롱이었다. 그렇게 그쪽 시간에 어느 정도 맞춰져갈 때 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니 또 시차 문제가 생겼다. 이젠 한국의 오전이 힘들어졌다. 거기는 밤이었으니까. 저녁만 겨우 말똥말똥하다. 거기는 낮이었으니까. 그래서 지난 주일 오전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