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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살아야 교회가 산다-8

왜 다시 기독교 세계관인가?

석종준 목사
서울대 캠퍼스 선교사
상대원교회 협동
침신대 학부 신대원 출강

지난주 캠퍼스에서 한 형제와 얘기를 나누던 중 이런 고백을 들었다.
“목사님 사실, 저도 우울증이 좀 있어요. 그래서 스트레스를 좀 강하게 받는 일이 생기면 영락없이 증세가 올라옵니다.”  평소 기독대학원 학생회 리더로서 주중 캠퍼스 기도회 인도와 수요채플 찬양을 잘 섬겨온 형제 고백이었기에 의외였다. 그는 이렇게 자신만의 대처법을 소개했다.

“목사님 그런데 저는 증세가 올라오면 예외 없이 캠퍼스 000건물 옆 인적 드문 소나무 군락 속으로 혼자 들어가서 한 두 시간 기도를 하고 나옵니다. 그러면 대개 회복이 되고, 적어도 큰 도움이 됩니다.”


요즘 캠퍼스에는 정말 많은 학생들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각박해진 세상에서 극단의 경쟁으로 내몰린 이 시대 청춘들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수년전 서울대 조사의 경우 28.9%였다. 전교생 수를 감안하면 거의 1만 가량의 학생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의사들에 따르면, 약을 먹으면 당연 도움이 되지만, 그렇더라도 종종 나타나는 부작용들이 있다고 한다. 자기 통제력이 무뎌진 상태에서, 몸의 충동에 따라, 어떤 사회적 일탈행위로서 자기방어기제를 작동시키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가령 폭음, 도벽, 도박, 성 문란, 자발적 고립(방콕) 등의 부작용이다. 실제, 캠퍼스에서 그러한 소식을 접할 때가 있고, 그때 마다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다. 지난 주 토요일(7월 7일)에는 성남의 한 교회 청년부 특강을 다녀왔다. 담당 목사께서 요즘 자기 교회 청년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창조론”, “이단”, “진로” 문제와 연계시켜 기독교세계관 특강 해달라고 부탁했다.


줄곧 해오던 캠퍼스 선교사역과 함께, 개인적으로 지난 2018년 1월 초부터 부임한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라는 초교파 기독교학술단체의 사무국장 일을 병행하부터 종종 받게 된 요청이다. 교회에 도착하니 특강 전 20여분 가량 함께 찬양하는 시간이 있었다. 찬양은 주로 세상에서 지치고, 상처받은 영혼들이 주 안에서 위로와 용기를 받고, 주님의 보호하심을 확신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여름 한복판 토요일 오후 2시, 특강을 들으러 나온 청년들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왜 다시 기독교세계관이어야 하는가? 기독교세계관(Christian Worldview), 즉 성경의 안경을 끼고 세상과 인생을 해석하는 삶만이 우리를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복된 삶을 살도록  인도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각자 선택한 안경을 끼고 삶을 채워간다. 그 안경은 어떤 이에게는 다른 종교, 또 이데올로기, 돈이나 명예, 정욕에 휩쓸린 욕망일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세상의 안경들은 결코 우리의 삶을 창조주 하나님이 예비한 가장 복되고 존귀한 삶으로 인도할 수 없다.


더욱이 이 시대는 이른바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에 무뎌져서, 각자 끼고 있는 모든 상대적인 안경의 가치를 냉철하고 정확하게 분별하는 안목을 상실시켰다. 그래서 “정의”(justice)란 모든 세계관, 즉 모든 안경의 가치를 대등하게 주장하는데 있다고 오도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에는 교파를 초월해서 약 200명 이상의 전국 수많은 대학교(일반대, 신학대 포함), 다양한 전공의 기독 교수님들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대부분이 청년의 때에 기독교세계관이라는 안경을 끼고 사는 삶의 가치를 깨달았다. 그래서 주 안에서 복된 삶을 살게 된 분들이라는 것이다. 정녕, 우리 인생의 메뉴는 어쩌면 믿는 자나 불신자 모두에게 공평하다(요16:33).


심지어 우울증 증세를 만나는 경우 역시 차별은 없다. 그러나 똑같은 인생 메뉴에 대한 극명한 대처의 차이를 보라. 어느 안경이냐에 따라서 누구는 하나님을 누구는 자기 파괴를 향한다. 습관을 좇아서 누구는 생명의 길을 누구는 죽음의 길을 십중팔구 찾아 나서는 모습을 본다.

물론 우울증에 대한 대처는 지극히 제한된 사례일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세계관이라는 이 안경의 가치는 결코 우울증에 국한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현장에서 목격되는 극명하게 대별되는 선택의 갈림을 보고 소름이 돋고 두려워진다. “주여! 부족한 종이 복음을 더욱 담대히 전할 용기와 힘을 더하여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