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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 품바들과 신세대 품바들

하늘붓 가는대로 -101

권혁봉 목사
수류 (水流)

1950년도를 전후해서 시골 5일장이 서는 날이면 상거래보다 더 신명나는 구경거리는 품바들의 공연(?)이었다. 남루한 옷차림, 며칠 동안 씻지 못한 얼굴들, 일 년 지나도 이발 못 해 부득불 장발된 두발 등 그들의 몰골은 그대로 꾸미지 않은 거지였다. 한 가족 4~5명으로 된 품바그룹도 있고 영 딴판 남남이 짝을 이룬 품바그룹도 있다. 이들이 국밥집이나 과자 파는 상점 앞에 나타나서 각설이 타령을 한다.


이상한 몸짓도 하고 요상한 소리도 한다. 짐짓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 생김새가 꾸밈없듯이 그들의 그런 공연도 꾸밈이 없다. 단지 그들의 소원은 과자 몇 개를 얻는 것이나 잔돈 한 푼 얻는 것뿐이다. 말하자면 그들의 생계가 걸린 거리의 공연이었다. 그 주변에 장꾼들이 모여들고 인심 좋은 상점 주인은 넉넉하게 동냥을 하는데, 이때 품바들은 어김없이 앙코르 공연을 한다. 의리가 있고 명예에 사는 그들인 것 같았다. 나는 이런 모습을 십대 소년시절에 매장마다 보고 살았다.


그런데 엊그저께 TV를 틀고 나니까 신세대 품바그룹이 공연을 하는 것을 시청했다. 말하자면 50년대에 있었던 품바들을 모방(模倣)해서 공연을 하는 것이었다. 거기 출연한 그 청년들을 TV가까이 가서 보니 모두 미남미녀에다가 잘 먹고 호강을 했는지 튼튼한 육체미를 가졌고 공연하는 순간에 조금도 애절한 표색이 없었다. 그들은 공연의 목적이 생계를 위한 과자조각이나 엽전 한 푼이 아닌 것 같았다. 그들에게는 그들 정체와는 다른 일부러 짐짓 꾸민 행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술이란 문화 활동을 하고 있었고 그 문화 활동의 대가로 출연료가 뒤따랐다.


50년대 품바들은 거지였지만 지금 그들은 문화예술인이다. 지금 신세대 품바들은 옛 품바들을 모범(模範)한 것이 아니라 모방(模倣)한 것이었다. 신세대 품바들은 옛 품바들의 겉모습만 따왔을 뿐 옛 품바들의 혼은 담지 않았다. 모방은 겉만 따오는 것이지만 모범은 겉과 속을 함께 따오는 것이다.
신세대 품바들의 노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쓴웃음이 나왔다. 무릇 모든 일에 혼이 빠진 행위는 논에 세워놓은 허수아비의 바람맞이 움직임일 뿐이리라.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범하는 자일지언정 모방하는 자가 아니다. 그런데 현 교계를 보자 하니 예수 모방자만 늘어나는 것 같다. 예수님의 혼과 그 분의 뜻은 담지 않고 그분의 겉모습만 모방하는 그리스도인은 영락없이 영적 위선자다. 예수의 선행을 모방하여 선행만 하고자 하는 자라면 십자가에 흘린 예수의 피는 모른다.


나는 그들을 일러 신판 율법주의자라 명한다. 오늘날 교회에는 모방교인과 모방교역자들이 득실거린다. 그리스도인은 진리의 모방자가 아니라 진리의 모범자요 진리의 추종자다. 모방자가 득실거리는 이 엉터리 군중 속에서 언제 예수의 모범자와 추종자를 찾아볼까.
사도 바울의 권고가 또 기억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