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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침례교 실천신학의 특성 이해와 발전 방향 - 3

이명희 교수
침신대 신학과 (실천신학)

펜윅이 선교사로서 한국에 오기까지의 과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가정과 교회 지도자들을 통한 가르침과 영적 훈련, (2)교회에서 교사 직분 등을 통한 훈련, (3)직장생활 등 사회 활동 경험을 통한 인성개발, (4)성경 사경회를 통한 선교적 사명 고취, (5)성경연구와 다른 선교사들을 통한 하나님의 뜻 발견, (6)선교 사역지 결정, (7)사역지로 가기 위한 파송 단체 물색, (8)후원자 모집, (9)선교 사역지로 출발. 한국에 도착한 펜윅은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노력했는데, 직접 사역하면서 언어를 배우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그의 경험은 후일 전도자를 길러내는 데 그대로 적용됐다.


한국에 도착한 펜윅은 자신도 전도와 성경교육 사역을 실천하면서 다른 많은 사역자를 훈련해 파송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전도자의 자격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사람이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성경의 실질적 지식을 알고, 영혼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은 사람”이다. 그는 제자들을 자신의 집에 기거하면서 훈련을 받도록 했는데, 1개월을 기본 단위로 한 주간은 기본적인 교리를 배우고, 세 주간은 나가서 성경을 보급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방식으로 사역을 하도록 했다.


펜윅은 예수님을 믿고 침례를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전도자가 돼야 하며, 성경의 절대권위를 신뢰하고 성령님을 의뢰하여 사로잡힘 속에서 전도할 것을 강조했다. 펜윅은 사역자들을 훈련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 성경학원을 세워 지도자를 양성했고, 성경강습회를 개최했으며, 달편지를 매달 보냈고, 성경을 번역해 출판하고, “만민의 좋은 기별”이란 전도용 메시지와 찬송가를 보급했다. 특히 달편지는 교단본부에서 소속 교회에 보내는 월례소식지 같은 것으로 소식은 물론 성경 교훈과 전도활동을 비롯한 여러 교회적 사역과 관련한 교훈들을 담고 있었다.


펜윅은 한국선교 초창기부터 전도와 선교에 힘을 썼다. 그 자신이 오지선교와 개척선교 그리고 신앙선교 정신에 투철했을 뿐만 아니라, 1906년 첫 대화회를 통해 교단을 조직하면서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오지선교의 이상을 실천에 옮겼다. 그는 “빈들과 산골”을 주요 전도 대상지로 삼아 복음사역에 몰두했고, 그것이 교세 확장의 큰 밑거름이 됐다.


펜윅은 이렇듯 준비된 전도자를 따로 세워 파송함으로 교회의 선교사역을 성취하고자 노력했다. 펜윅의 영향으로 동아기독교회 신자들은 전도를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여겼다. 펜윅은 전도하지 않고 주일만 지키는 신앙 행태에 대해 비판했는데, 이것은 주일성수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증인으로서의 사명에 소홀한 현대 기독교에 중요한 메시지를 준다고 생각한다.


펜윅은 그 당시 한국에서 사역하는 많은 선교사가 함부로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는 것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지적했는데, 그 이유는 업적을 부풀리기 위해 선교사가 인도하는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진실한 개종 여부를 확인하지도 않고 침례를 베풀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러한 지적은 많은 선교사에게 경각심을 주었을 것으로 보이며, 그 후 침례를 받기 위해서는 주일을 준수하고, 성경과 교회생활을 배우고, 술을 삼가고, 십일조를 드리며, 성경을 읽고 다른 사람을 교회로 인도하는 등의 신앙적 주제들과 신앙생활에 대한 분명한 검증이 이뤄지고 시험을 통과한 후에야 침례를 받을 수 있었다.


펜윅은 믿음은 언제나 행함이 따르기 때문에 행함과 믿음은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며, 믿음 안에서의 행함은 종말을 대비하는 중요한 요소로 여겼다. 펜윅은 세속적인 교육에 대해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고, 실제로 교회 지도자들에게 자녀를 세속 학교에 보내지 말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펜윅의 세속교육 기피론에 대해 결과적으로 훗날 준비된 지도자 공백이 생기고 한국침례교 발전에 지장을 초래했다고 해석하기도 하나, 펜윅의 성품으로 보거나 한국인을 사랑하는 그의 태도 등으로 보건대 한 마디로 그렇게 단언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본다.


오히려 학교교육 참여를 반대한 것은 신자들을 우상숭배로부터 지키고 또 진화론 등이 가미된 일본식 교육을 받아들이지 않게 함으로써 도리어 조선인을 지극히 존중히 여긴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필자가 유학 중에 만났던 이순도 여사(펜윅 선교사를 지근에서 모셨던 안대벽 목사의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대신에 그는 교회에서 “학당방”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글을 읽고 쓰고 셈하는 법을 가르쳐서 성경을 배우도록 했다. 그러므로 펜윅이 무조건 교육을 배척했다기보다는 복음 진리에 위배되는 세속 교육은 차단하되 복음전도에 필요한 교육은 적극적으로 펼쳤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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