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한국침례교 실천신학의 특성 이해와 발전 방향 - 4

이명희 교수
전 침신대 신학과
(실천신학)

펜윅의 사역 결실로 세워진 대한기독교회는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하여 마태복음 18장 15~17절의 가르침을 따라 교회 치리를 매우 엄격하게 시행했다. 문제가 있는 교인에게는 출교, 정권, 권책 등 세 가지 벌칙을 내렸다. 불신자와 결혼을 하거나 주의 만찬에서 남은 떡을 어린 자녀에게 먹인 일 등등이 징계의 경우가 되기도 했다. 또 침례 대상자에게 “규례문답”을 숙지시켜 시험에 합격해야 하도록 지도했다.


그 내용은 모두 25개 조로 되어 있는데 신앙적 실천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교훈에 일탈한 행위를 범한 자는 책벌하는 데 매우 엄격했으며, 교인들은 책벌을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펜윅의 중심 사상은 세대적 전천년주의, 초교파주의, 축자영감설, 현실적 유일주의, 신앙선교, 오지선교, 자립선교, 토착화선교 등인데, 그의 사역과 그에 의해 세워진 동아기독교를 실천신학적으로 평가한다면 지나칠 만큼 복음전도적이었다는 점을 우선 꼽지 않을 수 없다.


교회는 목양적 기구가 아니라 전도적 기구이며, 사역자도 목회자가 아니라 전도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졌다. 그리고 재정적인 면에서도 매우 독립적이었으며 비타협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아니면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고, 전도자들을 파송하면서도 자비량을 원칙으로 삼았다. 또한 근본적인 신앙관과 성경적 신앙정신을 강조했는데 그가 독자적으로 신약성경을 번역했고 성경에 기초한 교훈에 입각하여 매우 철저하게 훈육했고 원칙에 따라 치리도 분명하게 시행한 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나아가 인본주의와 세속주의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 사상에 대해 철저하게 저항했다. 진화론과 일제의 왜곡된 교육 방식으로부터 교인들을 지키기 위하여 세속 교육을 금지토록 한 점은 적극적인 저항정신의 표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펜윅의 실천은 세속 정신에 오염되어 가고 있는 현대교회에 큰 귀감이 아닐 수 없다.


2) 한국침례교회 초창기(1968년 이전)에 대한 실천신학적 평가
1945년 일제가 물러간 후 한국 땅의 동아기독교 성도들은 흩어진 교회를 수습하면서 새로운 진로를 물색하고 있었는데, 마침 남침례교 해외선교부는 베이커 고든(Baker J. Cauthen)을 한국으로 파송했고, 그는 한국의 침례교인들을 만나본 후 밀접한 관계를 맺는 데 있어 아무런 문제도 없음을 인식하고 “일 만 명의 침례교인을 발견하다!”고 보고했다.


한국에 파송된 남침례교 첫 선교사였던 존 애버내티(John A. Abernathy)는 한국에서 침례교 사역이 시작된 지 55년 만에 약 100개의 교회와 10,000명의 침례교인이 있고, 교회들은 총회를 구성하고 있고, 사도 바울의 정신을 따라 사역을 수행하고 있으며,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따르고 있다고 1951년 남침례교 총회에서 보고했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 통에 수많은 목회자들과 기독교인들이 순교했고 교회가 파괴됐다. 조지 브라운(George T. Brown)은 당시의 교계 모습을 다음과 같이 요약 제시해줬다: (1)지도자들이 부족하고, (2)교회의 물적 손실이 막대하며, (3)자립도가 현저하게 위축됐고, (4)도덕적 수준이 저하됐으며, (5)북한 지역에서 남하해온 신자들이 늘어났고, (6)신앙적 미담과 영웅들이 등장했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1951년부터 남침례교는 막대한 구호 사역을 시작했다. 그리고 1951년 한국의 침례교회들은 강경에 모여 총회를 결성하고 교단의 모든 정강정책을 남침례교를 따라 침례교적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애버내티는 “계속되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한국에서의 침례교 사역은 매우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고 있다. 거의 매주 새로운 교회가 세워지고 있다. 1951년 40여 개의 교회였는데 1952년 말 134개의 교회로 성장했다”고 1952년 남침례교 총회에서 보고했다. 전후 구호활동과 교회개척 사역 그리고 1954년 세워진 침례신학교를 통해 배출되는 많은 목회자의 활동을 통해 한국 침례교회는 급격한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교단 내의 여러 가지 이질적인 요소들이 내부적인 갈등 요인으로 잠재되어 있다가 결국 1959년 교단은  대전측과 포항측 두 그룹으로 나줘지고 말았다.


대전측은 남침례교 선교사들과 침례신학교 출신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모였고, 포항 측은 동아기독교 출신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모였다. 두 그룹의 분열은 신학적인 차이도 행습의 차이도 없었고, 다만 정치적 이해관계와 문화적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분열 상황 속에서도 1961년 주일학교 자료가 출간되고, 1962년에는 성경공부 교재가 간행됐다.


이 기간에 한국침례교회는 남침례교 선교부의 후원으로 다양한 신앙 강습회가 개최됐다. 목회자 강습회, 집사 강습회, 여전도회 강습회, 교사 강습회, 전도 강습회, 등등 많은 강습회가 열렸고, 미국 남침례교회로부터 많은 강사가 방문해 좋은 가르침을 전해줬다. 특히 1963년 그레이 앨리슨(B. Gray Allison, Mid-America 침례신학원의 설립자이다)이 인도한 전도 강습회는 괄목할만한 것으로써 많은 한국의 목회 지도자들에게 전도적 사명감과 영적 증진을 경험하게 해줬다.



배너

총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