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콜로라도 덴버에 사는 구두수선장이가 성령의 감동과 인도로 40일 금식기도 후 주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을 받아 그의 직업을 그만두고 복음을 전하고 따르는 치유의 은사로 수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했다. 심지어 눈먼 자, 귀머거리, 벙어리 및 위병, 관절염, 폐병, 절름발이도 고침 받아 즐거워 뛰었고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다. 한 사람의 헌신적인 금식기도의 응답으로 개인의 영적 부흥과 치유를 총해 교회의 부흥과 나아가 잃어버린 많은 영혼을 구원하게 이르렀다. “나는 저희가 병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시35:13)
신학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조금 일찍 울릉도에서 나와서 신학교 기숙사에 투숙하고 있을 때 대흥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자였고 신학교 교수의 강의를 통역한 주성범 집사는 나에게 오스본 부흥사의 신유(Healing the Sick)라는 책을 “한 선생은 섹스피어 공부를 대학에서 했으니 읽을 수 있다”라고 주어 완독하고 은혜를 받아 성령 충만으로 문 닫으려는 도안교회를 찾아가 목회가 시작됐다.
아래에 오스본 목사의 간증을 들어본다. “금식과 기도로 예수님 앞에서 우리의 생의 대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자 하는 당신을 볼 때 우리는 기쁘다. 그것은 당신이 책을 읽고서 우리는 여러 날 혹은 여러 주일을 금식하며 기도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나의 아내와 나는 여러 번 깊게 금식과 기도를 했다. 나의 생은 변해 하나님은 나를 병 고치는 목사로 쓰기 시작했다. 더욱 더 많은 사람이 고침을 받았다.
하루는 깊은 기도를 하는 동안 성령이 “내 아들아 내가 프라이스나 위글워드와 같이 있는 것처럼 너와도 함께 있으리라. 그들은 죽었다. 그러나 지금은 네가 일어나 일할 때다. 가서 그들과 마찬가지로 힘써 일하라, 너는 마귀를 내쫓을 수가 있다. 너는 병을 고친다. 죽은 자를 살린다. 너는 문둥이를 깨끗케 한다. 내가 너의 적의 힘보다 더 큰 힘을 네게 주는 것을 보라. 놀라지 말라. 담대하라. 강하라. 내가 그들과 함께 했던 것 같이 내가 너와 함께 한다. 죄의 힘이 너의 생에는 일어서지 못하고 나의 말을 믿는 사람을 네가 얻으면 나는 그들이 있는 동안 그들을 쓸 것이나 지금은 너를 쓰기를 원한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리라”(막16:20)
이 위탁과 요구는 주님이 즉시 주셨다. 때문에 나는 굉장히 두려웠지만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내게 알게 하셨다. 이 굉장한 위탁에 따라 더 많은 날과 주일을 금식기도하며 더 많이 고침을 받는 기적이 일어났다. 우리는 이미 12개주와 자메이카의 섬으로부터 병 고침 운동을 지휘할 수 있었다. 이 간단한 운동이 125명의 농아와 거의 90명의 맹인과 수백 명의 사람들이 다른 병에서 이적으로 구함을 받게 했다. 이 하나의 신앙부흥운동을 통하여 행복과 기쁨으로 개종한 사람이 9000명이나 된다.
금식이 우리의 몸에 해로운 것일까요? 이 문제는 금식을 주제로 한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많이 문제시 되어왔다. 현대의 의학으로 우리는 적어도 금식이 해롭지 않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금식은 순화하고 깨끗하게 한다. 즉, 그것은 순환의 균형을 잡히게 하며 건강에 지극히 필수적인 것이다. 여러 가지 배설하는 기관이 더러운 물질을 깨끗하게 하고 마치 갈아서 재가 되는 것 같이 모인 필요 없는 물질을 산화하고 소화하여 깨끗하게 한다. 금식이 시작되면 산화되고 배설되는 첫 번째 물질은 소화가 잘 안 되는 음식의 형태로 쓸모없는 물질들이 떠다닌다.
그런데 그것들은 때때로 모세혈관을 막고 림프관을 충혈한다. 달리 말해서 기관으로부터 우리가 배설되기를 바라는 그 물질들은 무엇보다도 자연스럽게 실제적으로 깨끗하게 되는 것이다. 금식은 우리 몸의 청소이다. 그때 성령이 머무르는 깨끗한 몸을 만드는 것이다. 깨끗함은 또한 경건함이다. 동화작용이 멈출 때, 배출은 매우 촉진된다”고 말했다.
이웃 사람들이 쓰러져가는 오두막집에서 암으로 죽어가는 한 여인, 곧 불쌍한 창녀를 낡은 손수레에 싣고 전도 집회에 참석했다. 이 여인은 수많은 세월 동안 좋든 싫든 죽지 못해 몸을 팔아 생명을 부지해 오다가 사형선고의 병에 걸렸다. 어떤 죄책감이나 수치감은 전혀 느끼지 못하던 철면피의 여자였다. 그녀의 좋은 이웃들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7)고 설득해서 그녀를 집회 장소로 데려왔다.
너무도 쇠약해진 그녀의 몸은 암으로 고통 받아 부어오른 복부와 창백한 피부에 앙상한 뼈만 드러나 있었다. 파랗게 펼쳐진 하늘 밑에서 낡은 손수레 위에 드러누워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 축복의 메시지, 곧 오스본 목사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녀는 “저가(하나님) 네 모든 죄를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시103:3)라는 말씀을 들으며 그녀의 모든 죄와 병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추하고 더러운 과거를, 한없이 흘러내리는 눈물과 후회로 슬퍼하며 회개했다. 친구들과 같이 울면서 회개했다. 지난날의 고귀한 인생을 헛되게 낭비한 것에 대한 깊은 반성과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였다.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 새 생명을 얻고 마음에 평안이 충만히 임해 거듭난 것이다. 감사와 감격과 기쁨에 복받쳐 그녀는 앙상한 팔을 내밀어 친구들의 손을 잡고는 그만 벌떡 일어났다. 그녀에게는 얼마나 오랜만의 일이었던지! 자신의 연약함을 까맣게 잊고 강단을 향해 걸어갔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불치의 암은 사라졌고 건강도 회복되어 교회에 나가 뜨거운 감사와 기쁨으로 헌신하여 충성하는 삶을 살게 됐다.
나는 이 기적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믿고 성령께 도움을 청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마음속에 모셔 들이고 삶 속에 모셔 들여 모든 것 위에 그의 우선권을 인정해야 한다. 구원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부활해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 곧 영원토록 변함없이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예수님, 그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금 여러분에게도 영육구원의 축복이 임하시길 바란다.
지금까지 138회의 외국 여행 중에 몇 번 복음 곧 선교의 일정이 없이 함께한 일이 마음에 뉘우치고 부담이 되어왔는데 언젠가 성령님의 책망을 받은 이후로는 첫째 해외여행에 그 여행비가 교회의 후원이나 성도들 개인의 후원이든 또는 내 자신의 속한 여비이든, 단체여행이라 홀로 빠져나오기 어려운 여건이든, 상대국이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기 어려운 복음의 적대국일지라도 전도지를 통해 줄곧 복음을 전해오곤 했었다.
얼마 전 서울지방회의 대만 해외여행이 있어서 위의 뜻을 지방회 동역자들에게 잘 설명해 동의 받고 수요일 저녁 김학천 선교사의 시무교회에 참석하고 선교 헌금하여 만들어 놓은 3000장 전도지를 여행 중에 다 뿌리니 목회자들은 매우 흡족하고 기뻐했다. 이번 필리핀 여정에는 여건이 좋지 않아 수요일 저녁 나 혼자 대표로 김 선교사의 선교지에 가서 수요 집회하고 안수기도를 했는데, 전화로 전한 소식은 여성도가 갑자기 코피를 많이 흘려서 정신없이 병원에 입원했는데 의사의 말로는 코피를 흘렸기에 뇌진탕으로 쓰러져 혹시 죽을 변고가 나지 않게 되었다는 감사의 전화를 받고 치료의 주님께 영광을 돌렸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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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이 돌아왔다. 참 빛인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해결하고 율법을 완성시키기 위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으셨다. 거룩하신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곳에 임하셨다는 사실에 목자들은 물론 동방박사들까지도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 경배를 드렸다. 그리고 이때 수많은 천군 천사가 함께 찬송을 드린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각 개교회들은 성탄트리를 장식하는 것은 물론 성탄절 칸타타를 연습하며 이 땅의 평화와 사방에 펼쳐질 복음의 은혜를 만끽한다. 교회뿐만 아니라 서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서울시청 광장과 대한민국의 입법기관인 국회의사당에도 성탄트리가 세워지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고 있다. 분단의 상흔이 씻기지 않은 한반도 문제와 지역, 세대, 남녀 갈등 등 어느 때보다 심각한 내상을 입고 있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하다. 그야말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절실한 2018년의 성탄을 맞이하고 있다. 교회는 빛을 발해야 한다. 복음과 사랑의 빛을 온 세
로티 문 선교사는 미국 남침례교(SBC) 선교의 전설이다. 해마다 남침례교 교회들은 성탄절 헌금으로 로티 문 선교사의 이름을 딴 ‘로티 문 헌금’(Lottie Moon Offering)을 드린다. 로티 문 선교사(1840∼1912)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격변기의 중국에서 헌신적 선교를 했다. 그는 선교지에 나간 여성 선교사는 아니었지만, 그 누구보다 ‘영향력 있는’ 최초의 여성 선교사다. 7남매 중 넷째로 버지니아에서 태어난 로티는 남북전쟁 전에 남부 아가씨에 걸맞은 교육과 귀족들이 누렸던 특혜를 받으며 자랐다. 로티 문이 13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믿음이 신실하신 어머니는 자녀들을 좋은 신앙인으로 키워냈다. 로티의 오빠 토머스와 언니 오리아나는 훌륭한 의사로, 막내 여동생 에드모나는 미 남침례교회가 파송한 최초의 독신여성 선교사 2명 중 1명이다. 로티의 사역은 1872년에 중국선교사로 파송된 동생 에드모나 선교사를 돕는 일부터 시작했다. 1873년, 로티 문은 중국 북부에 도착해 여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교사 일보다는 로티는 중국 현지 담당자에게 전도와 교회개척 분야를 희망했으나 그 요청이 거절되자 그는 홀로 핑투로 가서 교회를 개척했
2018년 달력이 이제 한 장만 남았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는 때다. 교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임재하심을 경험하며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교회는 또 상처로 힘들어 하는 자들과 아픔을 겪고 있는 자, 어려움이 해결할 조짐마저 보이지 않는 자를 향해 끊임없는 위로와 격려,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언제나 약자를 향해 손을 내미시고 어려운 자들을 일으켜 세워 세상 권력을 가진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다. 애굽의 압제와 권력에서 해방시키셨고 재산의 정도에 따라 하나님께 드릴 예배에 대해서도 성경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죄인된 자들과 병든 자, 소외된 이웃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몸소 실천했다. 그러면서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는 주의 말씀은 오늘을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이 실천하기를 명령하셨다. 그 뜻에 맞게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의 수많은 사랑을 나누며 실천했다. 굶주린 자들을 먹이고 입혔으며 어려움에 처한 자들, 순교의 순간을 맞이하려고 하는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켜냈다. 세상이 풍요롭다지만
매년 찬바람이 불어오면 우리 주변에서 가난하고 병든 이웃들 그리고 소외된 이웃들을 돌아보는 나눔과 돌봄을 위해 언론매체들은 사회의 관심을 모으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런데 나는 섬김, 나눔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이외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내 어머니의 달비(딴머리) 머리다. 지금은 가난이 내게 위대한 선생이 되었지만 유아시절 아버지께서 친구에게 서준 과도한 빚보증 때문에 집과 모든 재산, 가재도구들이 집단리에 의해 모두 경매처분 되어 갑자기 가난이라는 것이 호환마마보다 무섭게 우리 식구들을 덮쳤다. 그런 극한 상황에서도 부모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게 했던 최후의 끈이 “내 어머니의 달비”였다. 까마득한 기억의 어린 날, 친정어머니께서 큰딸 시집보내면서 반닫이 느티나무 농 밑에 고이 넣어 주셨던 대장장이가 정성껏 만든 까만 가위를 새벽기도 드리고 와서 곱게 갈아 옆에 놓고 어머니께서는 그 일을 하실 때는 꼭, 잠에 취한 어린 나를 깨우셔서 앞에 앉히고 둥근 체경(거울)을 손으로 잡게 하고는 비녀를 뽑은 삼단 같고 칠흑 같은 치렁치렁한 머리칼을 앞으로 곱게 넘겨 빗으시고 당신의 머리카락을 조금씩 조금씩 여기저기를 잘라내셨다. 그리고 잘라낸 부분이 보이지 않게
아직도 건국일 하나 제대로 통일하지 못하고 둘로 나눠져 대립하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다양한 분야에서 길을 잃으며 방황과 갈등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는 느낌이다. 주변국을 비롯한 세계는 급변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전쟁터 아닌 전쟁터를 만들며 나라 밖으로 진군하고 있는데 우리는 ‘정저지와’(井底之蛙), 즉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우물 안에서 ‘좌정관천’(坐井觀天)하고 있다. 좁디좁은 우물 안에 앉아 우물만큼의 하늘만을 보면서 하늘이 이러니저러니 한다. 자기 좁은 세계로 하늘을 보며 하늘을 말하는 개구리가 바다를 알리가 있겠는가? 아니 바다에 대한 생각 자체가 있겠는가? 최근 대한민국과 한국교회의 모습이 꼭 우물 안에 앉아 우물만큼의 하늘만 보고 서로의 옳고 그름을 논하는 개구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청와대와 정부는 남북문제에 정권을 몰입하지만 남북문제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된 것이 없고, 한반도와 세계를 위협한다는 북핵의 해결도 오리무중이다. 미중 무역 전쟁으로 촉발된 한국 경제는 연일 내리막길을 걷고 있어 이제 국민 대다수는 서서히 다가오게 될 경제 위기에 대한 두려움을 갖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그들만의 정책을 찬양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