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아내 그리고 둘째 딸, 이렇게 세 사람은 한동안 서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큰 딸과 헤어진 뒤 30분은 족히 그랬던 것 같다. 난 그저 앞만 보고 샌프란시스코 공항을 향해 운전만 할 뿐이었고, 아내와 둘째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창밖 경치만 구경할 뿐이었다. 물론 이는 지난 두주간의 반가운 가족 해후(邂逅)에 깊은 정이 들어서이다.
오랜만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저 재밌게만 떠들며 지내다 갑자기 또 가족 중 하나를 타국에 홀로 두고 와야 하는 미처 준비되지 못한 이별의 아쉬움이 좀처럼 가시지 않아서이다. 게다가 갑자기 자기만 남겨둔 채 세 명의 가족을 한꺼번에 보내야 하는 처지가 너무 황망하여 참았던 울음보를 그냥 터뜨리고야만 큰 딸의 역력한 허전함도 매몰차게 두고 와야 했음 때문이다.
이것이 얼마 전 미국에서 있었던 우리 가족의 모습이다. 물론 “뭘 그 정도 이별 가지고 그러시나, 더 큰 이별의 아픔도 있는데….”라 여기실 분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쉽게만 볼 수 없는 이유는 어느 가족이든 타인이 알 수 없는 그 가족만의 역동과 말 못할 사연이 다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두 가지 생각이 공항으로 향하는 동안 들었다. 첫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았던 울음보를 여과 없이 터뜨릴 수 있는 가족이 있음이 얼마나 소중한가’이다. 부모가 몰라서 그렇지 그 아이도 마음껏 울고 싶을 때가 있었을 게다. 억울해서 울고, 힘없어서 울고, 힘들어서 울고, 도와줄 사람 없어 울고, 외로워서 울고, 의논할 사람 없어 울고, 짐 날라줄 사람 없어 울고, 차 태워줄 사람 없어 울고, 스트레스 풀 대상 없어 울고, 먹고 싶은 음식 못 먹어 울고….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때나 울면 더 서글퍼지니 안 그런 척하며 참고만 살았을 아이. 운다고 누가 받아줄 이도 없기에 그냥 삼키는 것에만 익숙해졌을 아이. 그래서 그것이 더 스트레스가 되고, 병이 되었을 아이.
모름지기 사람에겐 이따금 감정의 배설도 필요할 때가 있는데, 각양의 감정 섭취에는 소화시킬 수 있는 감정도 있지만, 배설해 내보내야할 감정도 있는데 억지로 안 되는 소화만 시키려 했으니, 가뜩이나 홀로 헤쳐 나갈 일도 많고 져야 할 짐도 많은 아이가 어디 울 곳조차도 없었을 테니 꽤나 힘도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랜만에 가족 품에 안겨 잠시라도 엉엉 우는 그 아이를 굳이 달래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배설의 시원함을 경험하게 하였다. 누가 뭐래도 가족은 세상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감정배설소임을 알기 때문이다.
둘째, 사람은 누구나 ‘마음 통장’이란 걸 갖고 있다는 것이다. 돈 통장만이 아닌 마음 통장, 그 잔고 또한 풍성해야 한다는 것, 그게 부족하면 돈 통장 부족한 것만큼이나 힘들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그 ‘마음 통장’은 무엇으로 채워지는가? 이번에 보니 세 가지 정도는 있어야 되겠더라. 하나는 보호자, 하나는 공급자, 또 하나는 친구. 달리 말하면 날 지켜줄 사람, 날 채워줄 사람, 나랑 장난칠 사람.
그런 측면에서 이번에 나는 딸아이의 보호자 역할을, 아내는 공급자 역할을, 동생은 친구 역할을 해준 셈이다. 덕분에 딸아이의 그간 바닥난 마음 통장도 좀 채워지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가족은 이래저래 소중한 공동체인가 보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떨까? 교회 역시 하나님의 가족 아닌가? 안전하고 편안해야 할 또 하나의 공동체. 찬송과 기도로 묵었던 감정도 시원하게 배설하고, 말씀의 공급도 받으며, 성도 간 지지와 섬김을 통해 빈 마음 통장도 채우는 공동체. 그 공동체가 바로 우리 교회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이지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