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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부부무별(夫婦無別)

하늘붓 가는대로 -126

권혁봉 목사
한우리교회 원로

부부유별(夫婦有別)이란 말은 동양의 오륜에 나타나는 말이다. 부부간에는 구별이 있다는 사상이다. 그것은 사람됨과 함의 차이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부부무별(夫婦無別)의 시대가 되고 말았다. 끝까지 부부유별의 사상을 지켜야만 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임무이기도 하다.


어떻게 부부유별이 된단 말인가. 우선 신체적 생리적 차이 때문에 구별된다. 성전환이란 요상한 수술도 있다 하지만 날 때부터 신체구조가 달라서 여자가 아이를 낳았지 남자가 낳은 경우는 아직 한 번도 없다. 부부유별을 버리고 부부무별이 된 오늘이기에 남자가 남자끼리 부끄러운 일을 하고 또 여자가 여자끼리 부끄러운 일을 하니 이것을 동성연애라 하던가?


피조물도 자웅유별(雌雄有別)이다. 암컷끼리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고 수컷끼리 또 부끄러운 일을 안 한다. 거미 곤충만 보더라도 암컷은 몸집이 크고 수컷은 몸집이 작은데 이놈들은 암수가 알아서 짝놀음하고 수컷이 암컷에게 잡아먹히고 나중에 암컷이 무수한 알을 배출한다고 한다. 사람이 거미 앞에 부끄럽게 된 세상이다.
성경도 일찍 경고한 바 있었다.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1:27)


머리와 지체는 같이 붙어 있으나 역할은 다른 것이다. 지체가 머리 되고 머리가 지체되면 그 몸은 파괴된 몸이다. 성경의 말씀을 보자.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전11:3)
이 조직은 계급적 조직이 아니라 윤리적 조직이다. 남녀가 주 안에 구별되지만 반드시 공존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고전11:11)


부부유별의 현장은 어디인가? 위에서 신체적 생리적 구별을 말했으나 정신적 가치관적 구별도 엄존한다. 우선 창세기 3장의 타락기사를 보면 금과를 먼저 똑 따먹은 사고를 저지르고 남편까지 공범으로 만든 당사자는 여자 하와였다. 여자의 생각의 모자람이라 할까. 오늘날 부부남녀 무별에다가 동등까지 내세우면서 페미니스트의 발언이 강해졌다. 여자를 폄하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말하자면 예수의 생애에 마지막 관여한 여인들의 장면을 보라. 살아나신 주님에게 제일 먼저 달려간 여인을 보라.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막16:1~2)
그러나 여인을 남자 속에 품어준 성경의 묘사는 아름답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여기 한 사람의 이름은 하와가 아닌 아담이었다. 부부유별은 상하개념이 아니라 윤리개념이요 임무기능의 고정개념이다. 폐일언하고 나와 아내 간에 생긴 웃지 못할 이야기로 부부유별의 비근한 예를 들고 싶다.
나는 오랫동안 교수와 목회자 그리고 강사로 평생을 살아온 목사이기에 추석이면 선물이 많이 들어온다. 과장하면 장사를 해도 될 만큼 과일 등이 들어온다. ‘고맙고 또 감사한 것은 나를 기억해 주시는군요’이다. 그런데 이 모든 선물을 측근들에게 거의 다 나눠준다. 그렇게 선물을 비우고 난 뒤엔 겉 포장물이 현관에 쌓인다.


그해 추석엔 아내의 몸이 불편했던 것 같은데도 이 포장물 처리에 내가 도움을 주지 못했나보다. 아내는 만나는 자식들에게 수차 저 영감은 무정하다니, 가사일에 손끝도 움직이지 않는다느니, 그 해 추석에 고생했고 그래서 섭섭했다느니 하고 늘어놓는 것이다. 옆에서 듣자니 내가 미안한 듯한 느낌이 생겼다. 하지만 여러 번 되풀이되는 아내의 섭섭 토로를 듣고 있다 보니 나도 슬쩍 화가 났다.


“내가 천국 가고 여기 없었더라면 이런 선물이 들어왔겠소. 선물 기쁨과 포장물 버리는 수고 중 어느 것을 택하겠소?” 아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비로소 아내의 양심적인 자각이 발동했다. “참, 그건 그러네요.” 모두 웃었다. 손뼉을 쳤다. “역시 아버지는 명 변호사라니까요.” 어떤 아들이 말했다.


선물의 감사를 잊어버리고 포장물 버리는 수고에만 신경을 쓰는 나의 아내는 확실히 단견자(短見者)였다. 아내를 폄하하자는 생각은 추호도 없이 가정사 한 토막을 글로 쓰고 있지만 우리 가정에서는 부부유별이란 성경 진리가 증거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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