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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인자’(사람의 아들) 기독론(2)

신약성서에 나타난 신학 산책

김광수 특임교수
침신대 신학과

필자는 요한복음에서 ‘인자’(사람의 아들) 칭호가 나오는 구절들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에 관한 요한의 신학적 교훈을 검토하고 있다. 지난 호에서는 인자 칭호가 첫 번째로 사용된 구절(1:51)을 중심으로 인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연결자이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연결자 혹은 계시자를 가리킨다는 내용을 제시했다.


이번 호에서는 예수님과 니고데모 사이의 대화에 나오는 인자 구절들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에 관해 알아본다.

예수님과 니고데모 사이의 대화는 처음에는 ‘너’와 ‘나’의 개인적 대화의 내용(3:1~10)으로 시작하여 ‘우리’와 ‘너희’라는 공동체 사이의 대화(3:11~15)로 진행한다. 이 단락에서 ‘인자’ 구절들은 공동체 사이의 대화 부분에서 집중적으로 제시되며 인자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듭나게 만들어주시는 생명의 제공자로 제시된다. 예수님은 사람이 왜 거듭나야 하는지에 관하여 다시 ‘진실로’ 말씀을 통하여 니고데모를 설득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3:11~12).
여기서 대화는 “우리-너희”라는 복수 주어로 변경된다. 거듭남이라는 중요한 주제에 관한 개인적 대화로 시작한 이야기가 공개적 토론의 장면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것은 “너희들이 거듭 태어나야 한다”(3:7)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이미 암시됐다. “우리의 증거”는 예수님 자신이 말한 것 외에도 요한공동체가 그 시대의 사람들을 향하여 계속적으로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앙고백적인 증언이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표적에 관심을 가졌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합당한 신앙에 이르지 못한 유대인들을 대표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은 그를 보고 믿으며 알게 된 그의 제자들과 자기 자신을 연합시킨다. ‘너희’로 지칭된 사람들은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그의 증언을 거부한 유대교 당국자들은 물론 요한공동체의 증언을 거부하고 있는 유대교 회당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유대교 권력자들이 예수님의 증언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직접적인 말씀으로는 처음으로 언급된다.


땅의 일들과 하늘 일들에 관한 말씀(3:12)은 그 의미가 불분명하고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예수님의 교훈에서 육과 영 그리고 땅과 하늘의 대비는 헬라주의적 혹은 영지주의적 이분법의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이 말씀의 의미에 관해 두 가지 가능성이 제기되어왔다: (1)땅의 일들은 거듭남과 같이 비록 하나님에게서 기원한 일일지라도 땅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가리키는 반면, 하늘 일들은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에 보내는 일과 같이 하늘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2)땅의 일들은 육신의 출생과 같은 땅의 사건들인 반면, 하늘 일들은 땅의 일들이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서 위로부터의 출생과 같은 하늘의 사건들이다.


두 견해를 결합하여 땅의 일들은 인간의 출생이나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이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인데, 그것들은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를 통한 하나님의 활동을 비유적으로 가리키며 또 믿음을 증진시키도록 의도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견해도 있다. 땅의 일들은 예수께서 지금까지 언급한 것들이며 하늘 일들은 그 다음에 나오는 독백과 해설에서 논의될 내용이라고 말하는 견해도 있다.


곧 땅의 일들은 예수께서 전파하는 것들로서 땅에서 이뤄지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 활동을 가리키는 반면, 하늘 일들은 예수께서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돌아가는지 혹은 인자의 올리어지심과 같은 예수님의 근본적 존재성에 관한 것들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세상에 와서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들을 행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연합된 분으로서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에 관해서도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근본적 존재에 관해 ‘인자’ 칭호를 사용하여 제시하셨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3:13). 원어에서 이 구절은 내려오심이 언급되기 전에 올리어짐이 먼저 언급된다: “아무도 하늘에 올라가지 않았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인자 외에는.” 요한복음에서 인자는 근본적으로 하늘의 일들을 나타내기 위하여 땅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하늘로 돌아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칭호다. 이 구절에서 인자는 이미 하늘에 올리어진 존재로서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우리-너희의 형태로 말하는 3:11과 같은 입장의 언급이다. 그리스도의 올리어지심은 내려오심과 함께 복음 선포의 근본적 요소이며 또 그 두 국면이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전체를 이룬다. 예수님이 땅과 하늘 사이의 연결자가 되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 이러한 인자로서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땅에서 그의 존재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장소이며 또 하나님의 일들이 사람들에 의해 거부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 구절에는 또 예수님만이 참으로 하늘에 올리어진 분이라는 변증적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예수님만이 하늘(하나님)의 세계에 관한 지식의 근원이며 공급자이다. 이것은 하늘에 관한 지식을 갖고 있는 유대교의 다른 환상가들을 거부한다(에녹, 엘리야, 모세 등).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으며 그의 최후는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승이 있다(모세의 승천기).


중간기 묵시문학인 에녹1서에 따르면, 에녹은 하늘에 올라갔으며 또 그 에녹은 다니엘 7:14의 “인자 같은 이”와 동일시된다(에녹1서 70:2; 71:1). 엘리야도 마찬가지로 하늘로 올리어진 존재로 나타난다(왕하 2:11). 그러나 올리어진 인자로서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과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유일하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계시하는 분이다(1:18; 17:3).


예수님은 인자의 올리어짐의 기이한 방식과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뜻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4~15).
요한복음에서 인자의 올리어짐은 예수님의 근본적 존재를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된다(8:28; 12:32, 3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사건은 민수기 21:8~9에 나온다. 그 사건은 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특별한 방식을 설명한다. 이 말씀에서 그 사건에 담긴 핵심적 의미가 두 가지로 제시된다: (1)구리 뱀을 모든 사람이 쉽게 볼 수 있도록 장대에 높이 매달았다; (2)그것을 바라본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은 왜 갑자기 모세의 구리뱀 사건과 인자의 올리어짐을 관계시켜 말씀하는 것인가? 먼저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내면을 통찰하면서 그의 견해를 교정시켜주기 위한 목적을 생각할 수 있다.
니고데모는 표적을 행하는 예수님을 보면서 모세가 예언했던 “그 예언자”(신 18:15)로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근본적 존재에 있어서 모세가 말한 그 예언자가 아니었다. 참으로 해학적으로 예수님은 모세 같은 존재가 아니라 모세가 장대에 매단 바로 그 구리뱀과 같은 역할을 감당하는 신비의 존재였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 뱀과 같이 반드시 들려야 하는 인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왔다가 하늘에 올리어진 분으로서 모세를 능가하는 분이다. 인자의 올리어짐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올리어짐을 받은 후에, 그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수여하는 하늘의 존재가 됐다(12:32).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인자가 반드시 들려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자에게 주어진 숙명적 길을 나타내는 조동사와 함께 신학적 수동태의 표현으로 되어있다. 인자의 들리어짐은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숙명적 길이며 십자가에 들리어지고 또한 하나님의 영광에 들리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의 구리뱀 사건과 같은 기이한 방식으로 인자의 들리어짐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는 길을 선택하셨다. 모세의 기이한 행동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관계시킨 것은 요한공동체에서 복음을 설명하기 위하여 만든 독특한 방식이었다. 모세의 행위가 사람들을 뱀의 물림으로 인한 죽음에서 구원한 것과 같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여 생명을 얻게 하는 신비한 구원의 길이다(5:24).


요한복음에서 영생과 생명은 거의 같은 의미로 교대로 사용된다. “영원한 생명”의 ‘영원하다’는 형용사는 일차적으로 시간의 길이를 나타내기보다는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생명의 본질(nature)과 속성(characteristics)을 나타낸다. 영생은 삼위일체의 하나님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가리킨다(17:3). 예수님의 오심의 목적은 그를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것을 풍성히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10:11).


그러한 생명의 중심적 내용은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과 평화를 통하여 표현된다. 이 생명은 우리의 신체적 죽음을 통해 끝나지 않으며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영역)로 연장되는 점에서 시간적으로도 영원한 생명이다. 인자가 되신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들리어진 인자”를 바라봐야 한다. 요한복음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강조된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오직 “들리어진 인자”이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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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1:3) 2024년 부활절을 맞이하여 3500침례교회와 목회 동역자. 성도들 위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과 기쁨과 회복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죄인으로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이 부활의 기쁨과 감격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이 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직접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며 이제는 구원의 완성으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몸소 가르치시고 보여주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주신 사실을 믿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 분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가르치셨으며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고난 받는 자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그 회복을 통해 우리는 이 땅에 믿음의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 공동체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놀라운 소식입니다. 이 소식이 복음의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