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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천국 문을 치다

최선범 교수의 신약 원어 산책 – 2

최선범 교수
침신대 신학과
신약학

태종 시대에 대궐 밖 문루(門樓) 위에 북을 달아 놓고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하고도 그  원한을 풀지 못한 사람이 북을 치면, 그 사람의 소원을 듣고 왕이 직접 해결하여 줄 목적으로 신문고(申聞鼓) 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북을 치는 절차가 까다로워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북이 있으나 마나 했다. 서민들이 신문고까지 가기에 너무 먼 길이었다. 북을 치기 위해서는 먼저 수령에게 고하고, 다음에 관찰사, 그 다음에 사헌부, 그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신문고를 두드릴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세종이 왕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았던 1419년(세종 1년) 2월 17일, 참찬 김점(金漸)이 이름뿐인 신문고 제도를 혁신할 것을 제안했다. 모든 절차를 폐하고 누구든지 북을 칠 수 있게 하여 소원을 들어주자는 건의였다. 그래서 세종은 신분과 귀천에 관계없이 노비라도 북을 두드려 억울함을 풀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자 탐관오리들이 백성을 조정하여 청렴결백한 동료나 상관을 모함하는데 신문고를 이용했다.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 마구잡이로 북을 치거나 무고한 사람을 모함하는 자나 그 배후 세력까지도 엄격하게 처벌하는 제도를 보완했다고 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재판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은 원하지 않는 불리한 게임과 같다. 억울해서 고소를 했는데 상대방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고 도리어 ‘명예훼손죄’에 걸려 벌금형을 받기도 한다.


누가복음 18장을 보면, 신문고가 없는 시대에 자신의 억울함을 들어 달라고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가는 과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왜 그 여인은 재판관에게 재판을 부탁했을까?
상대편 원수에게 뇌물을 받고 재판을 뒤엎을 수도 있는 위험한 재판을 왜 그 여인은 요청했을까? 그것은 아무리 불의한 재판관이라도 그 사건의 내막을 듣기만 하면 그녀의 옳음에서 분출되는 한을 들어 줄 수밖에 없는 명명백백한 탄원서를 그녀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부가 한 번만이라도 재판을 열어달라고 여러 번 청했지만 재판관은 그 때마다 거절했다.
그래도 그녀는 낙심하지 않고 거절의 상처를 딛고 다시 재판관을 찾아간다. 과부의 유일한 무기는 재판관에게 끊임없이 찾아가는 것이다. 한두 번의 망치질이나 도끼질로 바위를 깰 수 없지만 수십 년 떨어지는 물방울은 바위를 깨는 것처럼 과부의 간청은 불의한 재판관의 견고한 마음의 문을 여는 위력을 발휘했다.


신약성경 원어의 표현을 권투로 비유하면, 과부는 재판관에게 가벼운 잽(Jab)을 날렸는데 재판관은 어퍼컷(Upper-cut)을 연속적으로 맞아 얼굴엔 시뻘건 멍이 들고 눈언저리가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다고 느꼈다.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눅 18:5) 여기서 “번거롭게 하니”라는 말은 물리적 폭력을 표현하는 동사로 되어 있다.


동사 u`pwpia,zw(휘포피아조)는 문자 그대로 주먹으로 얼굴을 쳐서 “눈언저리를 퍼렇게 멍들게 하다”라는 뜻이다(Aristot., Rhet. 3, 11, 15, 1413a; TestSol 2:4; Plut., Mor. 921f; Diog. L. 6, 89). 누군가에 의해 얻어맞고 얼굴에 멍들고 부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고 수치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u`pwpia,zw(위포피아조)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의미로 “창피하다”의 긍정적인 의미로는 혹독한 훈련을 통해 자신을 “통제하다”라는 수사적 표현구로 사용된다.


사도 바울은 u`pwpia,zw(휘포피아조)란 동사를 자신이 얼마나 영적으로 각성하기 위해 경건생활에 몰두했는지를 강하게 고백할 때 사용했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6-27). 여기서 내 몸을 “친다”라는 동사 u`pwpia,zw(휘포피아조)가 바로 누가복음 18:5에 “번거롭게 한다”라는 동사와 동일한 단어이다.


내가 전도한 사람은 변함없는 믿음으로 천국 문을 두드리는 기도의 힘으로 사는데, 나는 낙심하여 기도를 중단하고 있거나 오래 전의 소원으로 버려져있는 기도 제목이 있다면, 다시 한 번 불의한 재판관을 찾는 과부의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목적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눅 18:1) 낙심하지 않는 사람만이 기도할 수 있다.
믿음 있는 사람만이 기도할 수 있다. 그래서 믿음으로 계속 기도하는 사람은 대궐 밖 문루(門樓) 위에 북을 치고 울리듯 하늘의 궁궐 문을 치고, 천국 문이 열리는 기적을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