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르담 대성당 앞에 한 눈 먼 거지 소녀가 있었습니다. ‘저는 눈이 멀었습니다. 한 푼 주십시오’라고 적힌 푯말을 들고 적선을 했지만, 다들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어떤 남자가 다가와서 그 푯말에다 몇 마디를 써주고 갔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사람들이 소녀에게 돈을 주고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그가 써 넣은 문장은 이러했습니다.
“저는 당신들이 볼 수 있는 이 아름다운 봄을 보지 못합니다.”
눈 먼 거지 소녀에게 다가가 문구를 고쳐준 사람은 프랑스 시인 로제 카이유였습니다. “저는 눈이 멀었습니다. 한 푼 주십시오”라고 말한 것은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봄을 저는 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공감의 시였습니다.
구름은 바람이 움직이고, 사람은 사랑과 공감이 움직입니다. 아무리 옳은 것, 좋은 것이라도 공감 있게 표현하지 못하면, 사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사람은 견해가 일치할 때보다 공감할 때 가장 따뜻함을 느낍니다. 공감은 힘이고 능력입니다.
세계적인 사회학자 제레미 리프킨도 ‘공감의 시대’에서 21세기에 있어서 최고의 강자는 ‘공감의 능력을 가진 자’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매운 고추는 마른 고추도,빻은 고추도, 파란 고추도,빨간 고추도 아니라 ‘눈에 들어간 고추’입니다. ‘눈에 들어간 고추’라고 말하는 순간,자신과 대상이 하나가 되고,그 매운 감각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생어(生語)가 됩니다. 대상과 합일되는 가슴의 글, 공감의 설교가 최고입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언어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달랐습니다. 첫째, 그 뿌리가 하늘에 닿아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늘의 음성을 유머와 해학이 넘치는 ‘땅의 언어’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위트와 친화력과 공감이 넘쳤습니다. 예수님은 인문학적 언어 사용의 귀재이셨습니다. 그러기에 말씀이 힘이 있었고 권위가 있었고 짙은 공감이 있었습니다.
하늘의 음성을 공감 가득한 땅의 언어로!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 7:28,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