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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에 나타난 신학 산책

요한의 ‘인자’(사람의 아들) 기독론

김광수 특임교수
침신대 신학과

저는 요한복음에서 ‘인자’(사람의 아들) 칭호가 나오는 구절들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에 관한 요한의 신학적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지난 호에서는 오병이어 표적 사건 이후에 예수님을 다시 찾아온 무리와 예수님 사이의 대화에 나오는 인자 말씀을 통해 제시되는 신학적 교훈을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표적의 놀라운 영광을 체험했지만, 그 표적에 담긴 의미를 알지 못하고 육신의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에 예수님을 다시 찾아온 무리를 향해 예수님은 그의 존재를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으로 제시하셨다.


예수님은 단순히 육신의 양식을 제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삶에 진정으로 필요한 영원한 생명의 떡을 주러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이번 호에는 오병이어 사건 후에 진행되는 생명의 떡에 관한 예수님의 긴 교훈에 나오는 인자 말씀에 담긴 기독론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님은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지만, 그가 줄 떡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자기 ‘살’(육신)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라고 반문하는 유대인들과 변론하시면서 자기의 말씀의 참된 의미를 설명하셨다.


‘살’에 관한 오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살과 피에 관한 교훈을 계속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6:53). 이 단락에서 ‘살’이 6회 나오고 ‘피’가 4회 나온다. 예수님은 단순히 ‘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살과 피를 사용한다.


공관복음서들에서 살은 오직 8회만 나오며 성례전의 문맥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여기서 두 가지 점이 추가됐다. (1)예수님의 살이 인자의 살과 피로 변경된다. 인자는 살과 피를 가진 한 사람의 구체적 인간이다. 그러나 인자는 단순히 인간 존재로서의 인간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살과 피는 다른 사람들이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인자는 특히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은 인간으로서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가 하늘로 돌아간(올라가신) 분이다(3:13; 6:62). (2)인자의 살에 인자의 피가 추가된 것은 성례전을 표현하기 위한 방식이다. 피가 추가된 것에 관하여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피는 평행법적으로 사용되어 살의 의미를 다시 설명하거나 보충하는 의미를 가진다. 둘째, 살과 피는 성례전의 서로 다른 의미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피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필연성을 강조하고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생명을 상징하는 반면, 살은 신자들이 공유하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고난을 의미한다.


피는 성례전을 소개하기 위하여 평행법적으로 추가됐다는 첫째 견해가 더 타당하게 보인다. 인자의 살과 피는 함께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으로서 세상에게 생명을 주기 위한 화육하신 독생자의 삶 전체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그의 생명이 전달되는 통로에 관하여 다시 언급하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6:54~55).


이 구절은 인자의 살과 피가 “나(예수)의 살과 피”로 바뀐 것 외에는 앞 절의 말씀의 의미와 동일하다.
‘먹는다’는 동사는, 요한복음에서는 드물게 나오는데, 육식 동물들이 살을 먹을 때 주로 사용됐다. 이 단어의 사용이 먹는다는 의미의 다른 단어들과 구별된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요한은 여기서 보다 더 생생한 그림 언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날에 내가 다시 살린다”라는 말씀은 세 번째 언급으로서 앞에서 언급된 말씀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아들을 보고 믿는 자(6:40) = 내게 오는 자(6:44)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6:54). 이 말씀들을 통해 요한이 전달하려는 교훈은 명백하다: 아들을 믿는 자는 아들을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 속에 들어와 성례전에 참여함을 통해 아들과 연합된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또 성례전과 종말론의 조화를 나타낸다.


예수님은 그의 살과 피가 참된 양식이며 참된 음료가 되는 근거를 제시하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6:56~57).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한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완전하고 상호적인 신비한 연합의 관계를 나타낸다.


 ‘거하다’라는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의 그러한 신비한 연합의 관계를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거한다(14:10); 성령이 예수 안에 거한다(1:32~33);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거한다(6:56; 15:4).


저자는 예수의 거하심을 예수의 말씀의 거하심으로 표현하기도 한다(5:38; 8:31; 15:7). 예수의 제자들은 성례전에 참여함을 통해 예수와의 신비한 연합의 관계에 들어간다. ‘살아계신’이란 수식어는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을 소유하고 계신다”라는 요한복음 5:26의 의미를 전달한다.


아들의 존재는 전적으로 아버지에게 의존한다. 그래서 아들 자신의 독자적인 계획과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니다. 성례전의 참여를 통해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의 관계가 신자들에게 전달된다.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는 말씀은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의 관계가 예수와 신자들 사의의 관계에서도 성립됨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그가 주는 떡과 모세의 떡을 대조시키면서 단락의 교훈을 마감한다: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6:58). 이 말씀에 새로운 사상이 포함된 것은 아니며 앞에서 언급한 것들을 요약하는 성격을 갖는다. 다시 한 번 만나(그리고 그것이 상징하는 율법 체계)와 하늘의 떡 사이가 대조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공급되는 하늘의 떡만이 영생을 제공한다. 이 말씀은 나아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을 먹는 공동체와 생명을 주지 못하는 떡을 소유한 공동체의 대조를 반영한다.


저자는 이 단락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들이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친 전승에 기초함을 언급한다(6:59; cf. 막 2:21; 눅 4:31 등). 요한은 예수님의 교훈이 바다 건너편 열린 광야 지역에서 무리와 그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상황에서 제시된 것으로 묘사했다.


그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이루어진 교훈들이라는 언급은 다소 생소하다. 회당이라는 지역 유대교의 종교적 집회 장소가 요한복음서에서 처음 언급됐다. 회당은 바로 그 유대인들의 종교적 권위가 행사되는 장소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의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것을 스스로 알았다.


저자는 예수가 사람들의 내면을 통찰하는 초자연적 능력의 소유자임을 이미 제시한바 있다(1:47f.; 2:24f.). 출애굽 때 불신하는 백성의 불평을 나타내는 수군거림이 그 유대인들에게서 나타나고 또 제자들에게서도 나타난 것으로 제시된다(6:41).


그들의 수군거림에 대하여 예수가 대답하셨다: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6:61-62). “걸림이 되다”라는 단어는 공관복음서들에서는 일상적인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이곳과 16:1만 나온다.  “이 말이”라는 번역은 “이 말씀은 어렵다”(6:60)라는 제자들의 말에 기초한다.


요한복음 6:61b에서 “이 말이”로 번역된 단어가 원어에서는 중성 지시대명사가 사용됐다. 만일 6:61b의 “이 말”이 6:60의 “이 말씀”을 가리키려면, 남성 지시대명사가 사용돼야 한다. 따라서 “이 말”은 예수의 어떤 구체적인 말씀보다는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셔야한다는 예수의 교훈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수군거리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인자의 올리우심에 관한 말씀으로 대답한다.


거듭나야한다는 예수의 교훈에 대하여 니고데모가 의문을 품었던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인자의 올리우심을 통해 답변한 바 있다(3:13). 인자가 그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은 예수님의 존재의 근원을 생각하도록 인도한다. “이전 있던 곳”은 인자의 선재를 가리키는 특징적 표현이다. 인자의 존재로서 예수님의 올리어지심은 그의 내려오심에 상응한다. 그의 내려오심은 이미 자주 언급됐다(6:33, 38, 41, 42, 50, 51, 58). 올리어지심은 예수님의 존재의 근원과 결말의 이해에 있어서 필수적이다(3:14; 12:34).


인자가 올리움을 받고 영화롭게 된 후에야 비로소 그의 참된 존재가 나타나게 되고 알려지게 될 것이다(8:28). 그 때에야 비로소 인자가 영생의 떡을 성례전의 참여자들에게 제공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세상은 단지 십자가에 올리우는 인자만을 보게 될 것이지만, 그의 제자들은 믿음의 눈으로 하늘에 올리우신 인자를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