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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인자’(사람의 아들) 기독론(5)

신약성서에 나타난 신학 산책

김광수 특임교수
침신대 신학과

지난 호에서는 요한복음 오병이어 사건의 문맥에서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의 존재와 관련된 교훈들을 통해 나타난 인자의 존재와 역할에 관한 내용을 살펴봤다.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표면적으로는 나사렛 예수로서의 인간이시지만, 근본적 존재성에 있어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고 영원한 생명의 공급자이시다. 이제 이 세상에서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 마치신 후에는 인자가 이전에 계시던 곳으로 올라가게 될 것이며 아버지와 아들의 신비한 연합이 완성되고 완결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로 복귀하실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논쟁으로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세상의 빛이며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관한 교훈들에 나오는 ‘인자’ 말씀들 속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살펴본다.


예수님은 이미 바리새인들을 향해 그의 존재를 공개적으로 명백하게 언급해오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들을 영접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거부하고 배척하는 그들을 향하여 그들의 비극적 결말을 경고하셨다(8:21, 24). 예수님의 이 경고의 말씀은 엄숙한 선언이면서 또한 끝까지 거부하는 그들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의 표현이었다.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공개적 시인과 그의 모호한 대답은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던 때에 불타던 떨기나무 사건을 연상시킨다. 그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알아 그에 대한 그들의 우위적 지식과 위치를 확립하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파악할 수 없는 신비의 존재로 남아있다.
예수님은 그들의 그러한 부정적 태도를 다시 경고하셨다: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8:26).


이 구절의 전반부와 후반부의 연결성이 분명하지 않다. 비록 그 불신의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배척하고 있지만, 그는 아직 그들에게 해야 할 말과 판단할 것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자기 자신의 말로 말하지 않으며 그 자신의 판단으로 판단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의 임무가 심판(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일인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3:17; 8:15; 12:47), 그를 보내신 분에게서 들은 말씀들을 그들에게 말할 따름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전한 바로 그 말씀들이 종국적으로 그들을 판단하는 도구가 될 것이다(12:48). 그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여전히 모호한 비유로 남아있다.


요한은 그들의 이러한 무지의 상태를 지적했다: “그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8:27). 이 구절은 요한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한 첫 번째 명백한 경우이며, 그것은 등장인물들의 무지와는 대조적으로 독자들은 그것을 아는 특권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그를 보내신 분과 아버지 사이의 동일성을 바리새인들에게 앞에서 이미 언급한바 있다(8:16~18).


예수님의 대화의 상대자들인 그 유대인들은 그의 말씀들 속에서 그것에 관해 분명히 들었을 것인데, 그들은 어찌하여 예수님이 말하고 있는 대상을 모르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가? 예수님은 반복적으로 그의 존재에 관한 진리를 전달하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그의 말씀들을 거부하며 배척한다. 그러한 결과는 유대인들을 향한 선교 활동에서 요한공동체가 경험한 실망스런 상황을 반영한다. 그들의 반복된 증언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 유대인들은 믿지 않기 때문에 계속해서 오해하고 무지 가운데 있다.


예수님은 그가 진정으로 누구인가를 알게 되는 길을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셨다: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들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8:28).


인자의 수난/올리어지심에 관한 두 번째 말씀에서 마침내 예수님의 근본적 존재성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요한복음에서 인자가 들려야한다는 말씀이 세 번 나오는데, 그것은 공관복음서들에서 수난 예고가 세 번 나오는 것과 흡사하다(3:14; 12:32~34). 인자의 올리어지심은 십자가 위에 올리어지는 것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에 올리어지는 것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인자의 올리어지심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다 포함한다. 여기서 예수님을 진정으로 아는 길이 또 다른 방향에서 제시된다. 이제까지 예수님이 진정으로 누구인가를 아는 길은 그의 존재의 기원 곧 그가 어디서 왔는가를 아는 것으로 제시됐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과 반대 방향에서 그의 존재의 결말 곧 그가 어디로 가는가를 아는 것으로 제시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그가 하나님과 하나됨의 표현이다(10:18; 14:31). 그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사탄의 승리가 아니며 또 하나님이 예수를 저버린 것도 아니다. 그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든 후에야 그가 다니엘 7:13~14에서 언급된 ‘인자’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은 그가 올리어짐을 받기 전에는 완전히 알 수 없다. 이것은 그에 대한 완전하고 충분한 신앙에 이르는 과정의 예들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너희가 알 것이다”라는 말씀을 어떤 의미로 말씀하셨는가? 심판의 의미인가 혹은 구원의 의미인가? 먼저 심판의 의미일 수 있다. 여기서 ‘들어올리다’라는 동사의 능동태를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자의 올리어짐에 관한 다른 두 구절들에서 그 동사는 수동태로 사용되었는데(3:14; 12:32, 34), 그것은 그것에 담긴 하나님 편에서의 필연성 혹은 숙명성(dei/)이 담겨있는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 불신의 유대인들은 인자를 들어올리는 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며 따라서 그들은 인자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예수님을 죽음에 내어준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책임이다(19:11, 16). 그것이 암시하는 바는 그들의 죄와 그것에 대한 심판이다. 이러한 이해는 예수님이 그 유대인들과 심각하게 논쟁을 벌이며 그들의 부정적 결말에 관하여 경고하는 현재의 문맥과 잘 연결된다(8:21, 24).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이 구원의 의미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발견된다.

(1) ‘안다’는 동사는 요한복음에서 부정적 의미로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2)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관련하여 인용된 스가랴의 예언 곧 “그들이 찌른 그 사람을 그들이 볼 것이다”라는 말씀(19:37)은 일차적으로 그를 찌른 사람들에 대한 심판을 나타내기보다 올리어지신 인자의 구원하는 권세를 나타낸다.

(3) 올리어지신 인자가 모든 사람들을 그에게로 이끈다는 약속이 언급된다(12:32).

(4) 예수님의 교훈이 끝난 후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었으며 또한 그는 그에게 믿음으로 나온 이 유대인들에게 자기 자신을 나타내신다(8:30~31).


이것은 십자가 사건 이후에 그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일원이 될 것을 예상하는 말씀일 수 있다. 그 때에 그들은 공생애의 예수님이 자기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것들을 말씀한 것도 알게 될 것이다.예수님은 자기의 사역이 하나님 자신의 사역인 점을 다시 강조하여 언급하셨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8:29).


예수님은 그를 보내신 분이 그와 함께 계심을 확신한다. ‘기뻐하다’는 단어는 사복음서에서 여기에만 나온다. 그것은 요한일서 3:22에서 제자들의 역할은 주인의 역할을 대행하는 것을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됐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기뻐하시는 일”은 예수님을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일이다.


예수님은 그가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과 같이 아버지도 그를 버려두지 않을 것을 확신하셨다. 이 말씀은 인자의 올리어지심의 문맥에서 전달됐다. 사람들은 그가 아버지에 관하여 증언하기 때문에 그를 십자가에 매달 것이며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 의해서 버림을 받을 것이지만,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십자가에 들림을 통하여 아버지는 그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며(12:23; 13:31~32) 또 들리어진 그에게 세상을 이기는 승리를 주실 것이다(16:33). 요한공동체는 주변 사회의 주도적인 문화로부터 끊임없이 소외를 당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확신이 그들에게 큰 위로와 희망이 되었을 것이다.


요한은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예수님에 대한 무지와 거부와 배척의 상황에서 놀라운 결과를 언급한다: “그가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그를 믿었더라”(8:30). 이 말씀은 유대 지방에서 일반 청중이 표적을 보지 않고도 예수님을 믿었다는 첫 번째 언급이다.


여기서 요한은 왜 이 말을 하는가? 요한복음 2:23과 7:31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었다고 언급됐다. 그러나 그 구절들에서 믿음은 표적에 대한 믿음(2:23) 혹은 표적을 행하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7:31)으로 표현되었다. 반면에 여기서 믿음은 예수께서 “이것들을 말씀한 것”에 기초한다. 비로소 그들은 표적을 보지 않고도 예수님의 말씀에 기초해 그를 믿는 믿음의 바른 길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그의 존재를 이해하게 되는 그런 충분한 믿음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 그들은 다음에 계속되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예수를 거부하는 태도로 돌아가 예수님과 논쟁하는 대상이 된다(8:33이하). 그들은 이전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그의 교훈에 불만을 품고 그를 떠나간 사람들과 같이 행동한다(6:60, 66).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그의 참된 제자가 되는 길을 다시 그들에게 말씀해야만 하셨다(8: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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