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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 유다, 배반자

우리말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말이 있다. 수많은 사람 중에 생전의 모습과 죽은 후의 너무나 상반되는 이름을 구약에서 찾는다면 사울 왕일 것이고 신약에서 찾는다면 예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이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에 유다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두 사람이나 될 정도는 유대인들에게 유다는 아주 흔한 이름이다. 그렇다고 철수영희처럼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 중에 왕족의 머리를 지칭한다는 면에서 유다는 권위와 영광을 표현하는 이름이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영광스런 자신의 이름을 배반자의 이름으로 바꿔 놓았다.


복음서 기자들은 가룟 유다를 지칭할 때 꼭 수식어로 예수를 배반한 사람또는 예수를 팔 사람이란 별칭을 사용한다. 마태는 가룟 유다란 이름 없이 단순히 그를 예수를 판 사람으로 명시하기도 한다(26:48). 가룟 유다를 배반자로 규정할 때 사용한 헬라어는 배반자라는 명사가 아니라 분사로 되어 있다.


가룟 유다를 배반자로 규정하는 헬라어 용어는 부정과거 분사 o` paradou.j auvto,n(호 파라두스 아우톤, 그를 넘겨준 자)이거나 현재 분사 o` paradidou.j auvto.n(호 파라두스 아우톤, 그를 넘겨준 자)이다. 이 두 분사형의 원형 동사인 paradi,dwmi(파라디도미)의 문자적 의미는 넘겨주다이다. paradi,dwmi(파라디도미)란 동사는 단순히 한 사람이 어떤 물건을 주거나 전달해 줄 때 또는 아버지가 자녀에게 재산이나 전통을 물려줄 때 사용한다.


한 예로 바울을 자신이 받은 부활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을 변질될 수 없는 복음 전통으로 설명할 때 paradi,dwmi란 동사를 사용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고전 15:1, 3) 바울이 내가 받았다라고 할 때 현재 분사 1인칭 단수 pare,dwka(파데도카)를 사용한다.


바울은 복음 전승은 자신이 받은 십자가와 부활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 주고,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 주는 것으로 세계 복음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부활과 십자가 복음의 핵심인 동사 paradi,dwmi의 역설적 진리가 성립된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삼십에 팔아 십자가 형틀에 처형당해 죽게 하는 배반을 통해 십자가 복음을 형성하게 했다. 반면에 예수와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바울은 십자가와 부활 복음을 전달받아 복음을 전달하는 이방인을 위한 복음의 사도가 됐다.


왜 하나님은 유다를 사용하셨을까? 마태복음에 의하면 유다의 역할은 십자가의 죽음 앞에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의 주권을 광채를 강렬하게 나타나게 하는 배경으로 칠흑 같은 어둠이다. 예수가 빛이라면 유다는 빛 뒤에 있는 어둠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가 체포되는 현장에 빛과 어둠이 만난다.


죽음의 어둠에 갇혀 기도를 막 끝낸 예수는 일어나셨고, 칼과 몽치를 든 사람들을 대동한 유다는 예수에게 다가와 부드러운 인사말과 함께 입을 맞추고 곧바로 어둠으로 살아진다(26:49). 과연 예수를 팔아넘기는 군호인 배반의 입맞춤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십자가에 죽었을까? 폭풍을 말 한마디로 한순간에 잠재우셨고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가 손 하나만 뻗더라도 장풍에 모두가 쓰러지지 않았을까? 예수는 얼마든지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메시야의 권능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 권한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아버지여 나를 도우소서라는 한마디 말만 하더라도 하나님은 즉시 여러 열두 군단의 천사들을 보낼 수도 있었다(26:53).


만약 예수가 그렇게 하셨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에 승리하신 예수는 삶에서 실패하는 인간 예수밖에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능력과 권한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것을 통해 자신의 메시야 권한을 사용하셨다.


예수의 죽음은 그들 따르는 제자들에게 생명을 주고 구원을 주는 동시에 그를 따르지 않고 배반한 가룟 유다에게는 죽음으로 이어진다. 사실 마태는 예수의 죽음보다 앞서 유다의 죽음을 먼저 보도한다(27:10). 왜 유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무죄한 선생을 팔아넘겨 죽게 했다는 양심의 가책이었을까! “스스로 뉘우쳐그가 죽기 전에 예수를 팔고 받았던 은 삼십을 성전에 있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돌려준 것을 볼 때 그가 양심의 가책을 받고 어떻게든 자신의 잘못을 되돌리려고 한 나름대로 회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27:4~5) 사람들은 유다가 자살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쉽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제사장과 장로들과 함께 논의한 예수에 대한 부당한 재판에 대한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에 대한 대책회의에서 모든 책임은 예수를 팔아넘긴 가룟 유다가 져야 한다는 공론에 묻혀 유다는 자살 당한 것이다.


사람들은 가룟 유다가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는 극단적인 죽음에 관심을 더 두지만, 마태는 유다의 죽음보다는 더 많은 양을 할애하여 토기장의 밭이 나그네의 묘지로 사용하게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었다는 것에 더 큰 비중을 둔다(27:6~10). 반면에 누가는 유다의 죽음에 대해 두 가지 다른 관점에서 전달한다.


첫째로 가룟 유다의 죽음을 극단적인 선택을 통한 죽음보다는 배반자의 비참한 죽음을 강조한다.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1:18) “곤두박질(prhnh.j 프레네스)은 뜻은 머리가 땅에 먼저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행전에만 의존한다면 우리는 유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단지 당대 의사였던 누가는 유다의 머리가 먼저 땅에 떨어졌는데 뇌진탕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복부 파열과 장 출혈로 인한 사망으로 결론을 내렸다. 어떤 사람은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의 보도를 종합하여 가룟 유다가 목매어 죽은 후에 밧줄이 끊어져 떨어질 때 머리가 먼저 떨어지고 배가 터져 창자가 쏟아져나왔다고 생각한다.


둘째로 갸룟 유다의 영광스러운 열두 사도의 직분을 박탈하고 그 직책이 다른 사람이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1:20~26). 배반자 가룟 유다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의 정점은 영광스러운 직분일수록 잘못 사용하면 굴욕적인 결말을 맞이할 뿐만 아니라 그 영광을 다른 사람이 다신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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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1:3) 2024년 부활절을 맞이하여 3500침례교회와 목회 동역자. 성도들 위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과 기쁨과 회복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죄인으로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이 부활의 기쁨과 감격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이 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직접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며 이제는 구원의 완성으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몸소 가르치시고 보여주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주신 사실을 믿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 분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가르치셨으며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고난 받는 자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그 회복을 통해 우리는 이 땅에 믿음의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 공동체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놀라운 소식입니다. 이 소식이 복음의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