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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교 역사-11 영국 일반침례교 설립자 토마스 헬위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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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교를 창시한 사람은 존 스마이스였으나, 세계 침례교회의 모교회인 영국 일반침례교회를 설립한 사람은 토마스 헬위스였다. 그는 최초 침례교회가 메노파교회에 합병되는 것을 반대하고, 자기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영국으로 돌아가 1612년에 일반침례교회를 세웠다.

 

만일 헬위스 그룹이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도, 1630년대에 등장한 영국 개혁주의 침례교도들이 특수침례교회를 시작했을 것이지만, 적어도 일반침례교회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헬위스는 교단의 정체성을 이루는 침례교 교리와 사상을 정립하고 후세에게 물려주는 역할도 했다. 토마스 헬위스(Thomas Helwys, c.1575~c.1614)는 에드먼드와 마가렛(Edmund and Margaret Helwys)의 장남으로 1575년경 영국의 노팅험셔(Nottinghamshire)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13세기부터 17세기 초반까지 노팅험셔 근교에 살면서 성공한 농부의 가문을 일구었다.

 

아버지 에드먼드는 부유한 지주로서 브록스토 홀(Broxtowe Hall)이라 불리는 넓은 장원을 건설했다. 에드먼드는 1590년에 일찍이 세상을 떠났고, 헬위스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큰 재산을 운영하기 어려워 삼촌들의 도움을 받았다.

 

헬위스는 1592년 런던에 있는 법률학교인 그레이스 인(Gray’s Inn)에 입학했다. 그레이스 인은 캠브리지나 옥스퍼드와 달리 교회법을 다루지 않고, 영국보통법(English Common Law)을 가르쳤다. 그레이스 인은 영국 법조인들이 주도적으로 런던에 세운 4개의 법률학교 중 가장 유명한 학교로서,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과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을 배출한 명문학교였다.

 

헬위스는 15921월에 입학해 1594년 후반까지 2년간의 학업을 마친 후 1595년 초엽에 고향으로 돌아와 그 해 123일 조앤 애쉬모어(Joan Ashmore)와 결혼하여 브록스토 홀에서 지주의 삶을 살았다.

 

헬위스는 절친한 친구였던 리처드 버나드(Richard Bernard)를 통해 청교도 운동에 동참하게 됐고, 종종 브록스토 홀의 저택을 청교도 예배장소로 사용토록 했다. 헬위스는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스마이스를 만나게 됐는데, 그것은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됐다.

 

스마이스는 1600년부터 1602년까지 링컨(Lincoln) 시 교사로 봉직했고, 링컨 시는 브록스토 홀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두 사람은 1600년경에 만났고, 스마이스는 가끔 브록스토 홀에서 설교하기도 했다. 스마이스는 성공회를 비판해 16021013일 링컨 시 교사직을 잃고, 설교자 자격도 박탈당했으며, 1606년에는 게인스보로 마을에서 무자격자로서 설교했다는 이유로 심한 질책과 엄중한 경고를 받았다.

 

이러한 고난은 스마이스의 만성 폐결핵을 악화시켜 목숨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는데, 헬위스가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수 개월간 치료하고 회복시켜줬다. 둘은 막역한 사이가 됐다. 두 사람은 영국 국교회를 개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독립교회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1606년 게인스보로교회를 세워 스마이스는 담임 목사가 되고, 헬위스는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1607년 게인스보로교회가 비국교도에 대한 가혹한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이주할 때, 교인들의 여행 경비 대부분을 헬위스가 부담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미처 남편과 함께 네덜란드로 가지 못한 헬위스의 아내 조앤은 투옥되어 3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게인스보로교회는 암스테르담에서 1609년 초에 침례교회로 전향했다. 이 과정에서 담임목사 스마이스는 동료 영국인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았는데, 특히 스마이스가 스스로 자신에게 침례를 베푼 것이 심한 조롱과 비판의 대상이 됐다.

 

그때 스마이스의 친구 존 헤더링톤(John Hetherington)은 스마이스에게 주변의 메노파교회로부터 침례식 집례를 요청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요지의 편지를 보냈다. 이후 스마이스는 메노파교회에 대해 진지하게 살펴보기 시작했고, 메노파교회가 신자의 침례를 계승해왔다고 확신하게 됐다.

 

스마이스는 자신은 유아세례를 받고 신자의 침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계승이 결여된 상태에서 교인들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그러니 참된 침례를 계승한 메노파교회에서 다시 침례를 받고, 아예 그 교회에 가입하자고 설득했다. 다수의 교인들은 담임목사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나, 헬위스와 10여명의 사람들은 결연히 반대했다.

 

그들은 스마이스로부터 받은 침례는 합법적이고 정당하므로 또 다른 침례는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헬위스는 스마이스가 계승론, 기독론, 칭의론, 교회론에서 재침례교 신학을 받아들인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두 그룹은 결별의 수순을 밟았다.

김용국 교수 / 한국침신대 신학과(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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