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있어 좋다. 나를 이뻐해주어서. 냉장고가 있어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 좋다. 나랑 놀아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어느 초등학교 2학년이 썼다는 “아빠는 왜?”라는 시다.
아빠라는 존재가 초등학생 아이에게 냉장고보다, 강아지보다 못한 존재인 듯한 모습에 글을 읽으며 남자로, 아빠로서 서글픈 마음마저 든다. 이것이 어느 한 아이 만이겠는가? 한국에서 아빠라는 자리, 남편이라는 자리가 외로움을 느낄 수 있게 만든다.
요사이 더 많이 접하는 연애인 사망뉴스, 가족사망 뉴스가 사람의 가치나 존엄을 망가지게 한다. 어느 연구에서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외롭다’, ‘괴롭다’거나 ‘슬프다’와 같은 말을 자주 사용한다고 한다. 또 ‘나’라는 자신을 지칭하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며,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을 표현하는 단어를 적게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타인보다 자신에게 더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초등학생이 쓴 글에서처럼 자신 위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이라서 기보다 우리 모두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한다. 믿음에서조차 “우리 가족”, “우리 교회” 그리고 “우리 민족” 등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실상은 “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라는 단어를 넘어 다른 사람을 향해 눈을 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믿음의 눈일 것이다.
어느 찬양 중의 가사처럼, 주님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나의 두 눈이 향하기 원하고, 주님이 울고 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 발이 향하길 원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믿음이다. 성령이 임하시면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를 넘어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까지 이르러 눈이 향하고, 발걸음을 향하게 한다.
많이 알고 있는 이야기로, 오래 전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방송프로에서 할아버지가 문제를 내고 할머니가 맞추는 시간이었다. ‘천생연분’이라는 문제 단어를 보고 할아버지는 “당신하고 나 사이”라고 질문 한다. 돌아온 할머니의 대답은 “원수”다.
그러자 화를 내듯 “아니 네 글자로 우리 사이”라고 고함을 쳐보지만 한참을 생각한 할머니의 대답은 “평생 원수”라고 대답한다. 모두가 배꼽을 잡고 웃지만 할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 평생 함께 했다고 생각한 남편의 자리, 아빠의 자리가 원수가된 듯하다.
미국에 처음 갔을 때 공원 연못에서 불평 없이 몇 시간을 낚시 바늘에 지렁이를 끼워주는 아빠와 계속 실패하면서도 즐거워하는 어린 아이의 모습은 한국에서 바쁘다고, 일이 많다고 아이들 운동회조차 한번 제대로 가보지 못했던 한국 목사 아빠의 모습이 비교가 됐다.
가정은 뒤로 하고 일에만 매달려 달려왔던 시간의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작은 일을 소홀히 여기고 큰일(?) 한다고 분주했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찌어다”(마15:34)라고 말씀하신다.
지금은 볼 수도 없고 고맙다는 말도 할 수 없는 분이시지만, 어릴 적 먹을 것과 통을 하나 들고 산속에 들어가 가재를 잡으며 함께 해 주셨던 아버지, 여름엔 수박 하나 들고 냇가에 가서 멱을 감으며 함께 해주셨던 아버지는 살아가면서 어렴풋하게 가족이라는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얼마 전 시골의 작은 마을에 낡은 예배당이 있는 임지로 아들을 떠나 보내시는 어느 목사님의 사연을 들었다. 안쓰러운 마음으로, 한 영혼을 귀히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을 품고 시작한 걸음이 변하지 않기를 기도해 본다.
진도에서도 최고령 지역이라고 하는 백동에서 하루가 다르게 힘을 잃어가시는 분들을 만나며, 어느 날 갑자기 조급함이 생겼다. 손잡고 “함께 예수님 믿으시고 천국 갑시다.” 건네고 돌아설 때 ‘내가 저분들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저분들이 나 때문에 있는 것이구나.’라는 감사한 마음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