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종말론적 현상들 중 하나가 세계적 전염병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눅 21:11)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사도 요한은 세상 끝에 있을 종말론적 현상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문자적 의미로 전달한 것보다는 상징적 그림 언어로 바꾸어 묵시문학적 환상의 틀로 바꾸어 전달했다.
요한계시록 6장에 네 번째까지의 인 심판은 서로 다른 색상들의 말과 그 말 위에 탄 자들의 환상을 통해 종말의 현존성과 임박성을 강조한다.
첫 번째 머리에 면류관을 쓰고 활을 들고 흰 말 탄 자는 정복을 통한 평화를 가져다주는 자라면(6:1~2), 사람들을 죽이는 붉은 말을 탄 자는 전쟁을 상징한다(6:3~4). 말을 탄 자는 전쟁 후에 결과적으로 따라오는 극심한 기근을 상징한다(6:5~6). 마지막으로 네 번째 청황색 말은 죽음을 상징한다(6:7~8). 네 말 탄 자들의 환상은 평화, 전쟁, 기근, 죽음이 인간의 이기적 죄악의 결과로 인간 스스로 되받은 인간재앙이 인류 역사에 일어났고 앞으로 더 극단적으로 일어날 것을 통해 이미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거대한 수레바퀴가 이 땅에 도래했다는 것을 투사시켜주는 종말론적 그림들이다.
하나님이 굴리시는 심판의 수레바퀴는 평화, 전쟁, 기근, 죽음의 네 축으로 이루어진다.
그 중에서 마지막 심판의 축은 청황색 말로 투영되는 죽음의 축으로 그 이미가 중첩되어 흐리게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이전 다른 말들과 비교해 네 번째 말의 색상이 무슨 색깔 인지 또는 말 탄자가 누구인지 불명확하기 때문에 더욱 궁금증과 공포감을 불러일으킨다.
청황색 말로 번역된 헬라어 명사는 크노로스는 채소나 살아있는 나무를 표상하는 초록색 의미할 수 있다.
문제는 생명의 푸르름을 표상하는 녹색이 어떻게 죽음을 상징할 수 있는가이다. 녹색과 청색은 분명히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국어 성경에는 크로노스를 녹색도 아니고 청색도 아닌 “청황색”이라고 표현했다. 한국어 번역의 의미로 보면 크노로스는 녹색도 청색도 황색(노란, 빨강)도 아니다.
그렇다면 일곱인 심판에서 네 번째 말의 색은 무슨 색이란 말인가? 그리고 청황색 말이 어떻게 죽음이란 이름을 갖고 영원한 심판의 장소로 인도하는 죽음의 길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요한계시록 6:8에 크노로스는 죽음의 색이다. 시체가 썩어 부패하여가는 과정을 나타내는 색이다. 즉 생명에서 죽음으로 가는 색이다. 초록색 벼가 누렇게 말라 가는 색이다. 코로나19에 감염되어 죽은 사람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마 청황색은 전염병에 죽은 시체의 색깔과 유사할 것이다.
청황색 말에 탄 자의 이름이 “죽음”이란 표현에서 청황색 말을 탄 자는 죽음을 상징하고 그 뒤에 그 뒤에 “음부”가 따라온다는 것을 통해 전쟁 후에 극심한 기근과 전염병을 통해 사람들이 죽어가는 참혹한 상황을 말해 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요한계시록 6:8절에 죽음과 음부라는 죽음과 관련된 용어만이 나오지 전염병이란 용어가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구약에 유일하게 전염병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언급한 것은 다윗 말기에 일어난 3일 간의 전염병이다.
그 외에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전염병일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예언적 선포의 문맥 안에 전염병이란 용어가 여러 곳에서 사용된다. 히브리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역(LXX)에서는 전염병을 일관되게 “죽음”이란 단어로 번역했다는 것이다.
70인역의 번역자들이 구약의 전염병으로 죽는 공포의 사건을 인격화된 “죽음”으로 일치하여 생각했던 것 같다. 요한은 70인역 번역자들의 사고의 틀을 그대로 따른 것 같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서에서 “칼과 기근과 전염 병”을 마지막 때에 하나님 심판의 삼대 요소를 정형화하여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헬라어로 기록된 요한계시록 6:1~8절의네 말 탄 자들의 환상 중에 두 번째 칼의 심판과 세 번째 기근의 심판과 네 번째 죽음의 심판을 히브리어로 번역한다면 칼, 기근과 전염병(죽음)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 공포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우리는 이미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말론적 전염병과 죽음의 공포라는 종말론적 심판의 시대에 살고 있다. 코로나19는 삶과 죽음이 우리 주변에서 얼마나 가까운 멀리할 수 없는 친구 관계인지를 실감 나게 한다. 오늘은 푸른 나무 같고 연초록 생명의 활기를 띤 웃음이 만발한다고 해도 내일은 누렇게 말라비틀어져 빗물에 짓밟히는 낙엽에 같을 수 있다.
코로나19에 감염된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라 검푸르게 타들어 가는 있는 생명의 끝과 녹색인지 청색인지 황색인지 구별할 수 없는 죽음 앞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더 큰 일은 죽음에서 생명을 가져다주는 십자가의 색깔이 죄악의 어둠에 가려 더는 무슨 색깔인지 구분이 되지 않고 죽음의 색깔로 퇴색되어 간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이미 우리가 종말의 문턱 앞에서 있다는 통찰을 통해 다시 복음의 원점으로 돌아가 회개와 복음을 받아들이고 선포해야 할 것이다.
최선범 교수 한국침신대 신학과(신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