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서 연속 이기고 언약궤까지 빼앗은 기쁨은 잠깐, 블레셋은 언약궤를 조롱거리로 삼으려는 뻘짓 때문에 다곤 신은 박살나고, 언약궤를 갖다 놓은 지역마다 독종 재앙으로 비상이 걸렸다. 환난을 면해보려고 이리저리 언약궤를 옮겨보기도 했지만 지역마다 쑥대밭이 됐다. 옮길수록 환난은 더 커지고, 사망 자가 속출하기까지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하나님을 포로로 잡았다고까지 생각했는데 오히려 자기들이 포로가 된것 같다. 그야말로 언약궤를 빼앗아 온이후 일곱 달은 공포의 7개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급기야 블레셋의 지도자들은 언약궤를 돌려보내기로 결정한다.
언약궤를 반환하는 블레셋
언약궤 반환을 결의한 블레셋 지도자 들은 자신들의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자문을 구한다.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삼상6:2).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은 하나님께 속건제를 드릴 것을 제안했고,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제안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을 만들어 신을 달래려 한다. 유사한 것을 바침으로 재앙을 피하려는 주술적 행위인 동종요법으로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금 쥐는 독종이 쥐를 통해서 전파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고, 금 독종은 멀리 전염병을 떠나보낸다는 의미로 만든 것 같다. 그리고 다섯 개씩 만든 것은 블레셋이 다섯 개 도시 연맹체였기 때문이다. 그 다섯 도시는 아스돗, 가사,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이다(17절).
블레셋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그들이 믿는 우상 정도로 여기며 그저 액막이나 액땜 형식으로 재앙을 피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들은 사람들에게 심리적으로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미신이고, 인간적인 방법일 뿐이다.
블레셋의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은 애 굽의 역사를 상기시키기도 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려 하실 때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보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다가 열 가지 재앙을 당하고 난 후, 감당할 수 없는 큰 손실과 인명피해를 당한 후에 결국은 내보내게 된 것을 언급한다.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 민족을 추격하다가 홍해 바다에서 수장된 사실을 생각했던 것 같다.
블레셋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의 제안대로 새 수레에 속건 제물과 함께 언약궤를 보내기로 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스라엘의 신인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려야 살길이 열린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이 생각했던 속건제는 타인의 권리나 재물을 침해하였을 때 그 보상 또는 배상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의 제사다(레 5:14~26).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반환하되 하나님께 범한 뻘짓에 대한 보상까지 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두 번 연속 참패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포로가 된 것은 아니다.
포로는커녕 하나님은 뻘짓하던 블레셋의 주요 도시들을 휩쓸며 홀로 싸워 이기셨다.
결국 블레셋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언약궤 반환은 물론 전능하신 하나님께 드릴 속건 제물까지 보내게 된다.
젖 나는 암소들을 통한 반환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돌려보내면서 한 가지 시험을 한다. 아직도 독종 재앙이 그들에게는 이방신인 여호와에게서 왔다는 것을 믿기 싫은 것이다. 그 시험이 젖 나는 어미 소 두 마리가 끄는 수레에 언약궤를 싣고 벧세메스로 곧장 가는지 지켜보자는 것이다. 만일 곧장 가면 이 재앙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인정하겠지만 그렇지 않고 돌아오거나 다른 길로 가면 이 재앙을 우연히 당한 것으로 여기겠다는 것이다.
목적지는 골짜기 건너편 이스라엘의 벧세메스, 예루살렘 서쪽 22㎞ 지점 유다 지파의 땅이다(수21:13~16). 문제는이 소가 멍에를 메어본 경험이 전혀 없는 소, 다시 말해 훈련되지 않은 소라는 것이고, 또 낯선 초행길이라는 것이다.
마치 우리네 인생길과 같다. 인생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이 고, 중간에 어떤 변수가 있을지 아무도 모른 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다면 목적지까지 가는 것이 절대 불가능한 모험인데 지금 이 소들이 그 길을 간다.
놀라운 것은 그들에게 두려움이 없다. 또 때가 추수 때인지라 먹을거리에 유혹당할 법도 한데 눈도 돌리지 않는다. 더욱이 자기 새끼를 둔 젖 나는 어미 소라면 본능적인 모정 때문에 이 소들이 목적지까지 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아닌가?
2014년 구제역 때문에 수백 만 마리의 소를 근육이완제 주사로 도살한 적이 있었다. 그때 강원도 횡성에서 어미 소를 안락사시키려고 주사를 놓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보통 주사를 놓으면 10초에서 1분 사이에 죽지만 송아지가 젖을 달라고 보채기 시작하자 어미 소가 3분을 버티다가 새끼 송아지가 입을 떼고서야 쓰러지더란다. 이게 어미 소의 본능이다.
그런데 본문의 어미 소는 뒤돌아보지 않고 곧장 벧세메스로 간다.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 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 까지 따라가니라”(12절). 정을 억제하지 못해 눈물은 흘리지만 갈 길을 다 간 것이다.
이 소들의 자세가 신앙인들에게는 좋은 모델과 같다. 신앙생활도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어떤 시련과 역경이 있어도 하나님의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부적합한 소들이었지만 이 소들이 벧세메스에 잘 도착한다. 기적이다.
그러나 동물 애호가들이 기절초풍할 만한 일이 벌어진다.
이 소들이 제물로 바쳐진 것이다. 암소들은 번제물로 바쳐지고 그 수레는 번제용 나무로 쓰인다. 오랜 길을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달려온 소들 인데, 헌신하며 수고한 것에 상응하는 대접이나 어떤 최소한의 대가는커녕 불에 살라지고 만다. 소들 입장에서는 너무 억울할 것이다. 논란거리가 될 수도 있지만 헌신하고 공을 세우더라도 대가를 바라지 말라는 뜻으로만 받아들이면 좋겠다.
사실 억울하기로는 예수님이 최고였다. 아무 죄도 흠도 없는 분, 천국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고 병자들을 고쳐주셨을 뿐인데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기까지 하시지 않았나? 성경은 사명자라면 자기 영광을 취하지 말고 끝까지 충성하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반응
전쟁에 패하고 빼앗긴 지 7개월 만에 언약궤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온다.
이 모습을 본 벧세메스 사람들은 기뻐했다(13절). 그들만의 기쁨일까?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 모두의 기쁨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며 영광을 돌린다.
그들은 언약궤를 싣고 온 수레를 패서 번제단에 올려놓고 수레를 끌고 온소들을 잡아 번제물로 드린다.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니라” (14~15절).
그런데 벧세메스 사람들 중에 언약궤를 들여다보다가 70명이 즉사하는 불상 사가 일어난다. 19절 말씀 중 괄호 속의 오만이라는 숫자는 필사자의 실수인 것 같다. 여하튼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는 거룩한 언약궤를 호기심으로 함부로 대한 것이 언약궤 모독으로 여겨진 것이다. 기분 따라 행한 행동도 뻘짓이 되고, 하나님의 즉각적인 형벌을 불러올 수있다는 것,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은 이방인은 물론 택한 백성에 의해서도 결코 침범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크게 당황했다.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7:20), 그들은 탄식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동북쪽 약 14.5㎞ 떨어진 기럇여하림 사람들에게 사자를 보내어 인수해 가도록 요청한다.
결국 언약궤는 기럇여하림 아미나답의 집으로 옮겨지고, 그의 아들 엘리아 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20년 동안 지키게 한다. 여호와의 집이 있는 본래의 본거지인 실로로 옮기지 않은 것은 실로가 에벤에셀의 전투에서 파괴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문제는 벧세메스 사람들, 자신들의 잘못을 돌아보기보다 하나님을 무섭고 두려운 분으로 여긴 것은 어리석은 태도였다.
하나님이 엄위하신 것은 맞는다. 하지만 구원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 대속의 십자가를 지게 하시고, 우리를 결코 버리시지 않는 사랑의 하나님 아닌가.
벧세메스 사람들은 주어진 복을 스스로 포기한 꼴, 그들은 기회를 놓치지 말았어야 했다.
이희우 목사 / 신기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