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예수님의 맹인 치유 사역에 담긴 영적인 의미 곧 복음으로서의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맹인 치유 사역은 단순히 육신의 맹인이 눈을 떠서 시력을 회복하는 신체적 치료라는 표면적 의미를 넘어 보다 더 심오한 영적인 의미가 있다. 맹인 치유 사역에는 영혼의 눈이 열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의미이다.
그래서 맹인 치유 사역들에서 사용된 핵심 동사인 “다시 보다”라는 동사의 의미를 통해 영혼의 눈이 열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보고 구원에 참여하는 것으로써 영적인 의미를 알아봤다. 이 영적인 의미는 예수님의 치유 선언에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느니라”라는 구원의 선포가 맹인 치유 사역에 담긴 구원의 의미를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의 맹인 치유 사역의 영적인 의미를 보다 더 분명하게 알려주는 사건이 사도행전에서 기독교인 박해에 선봉에 섰던 유대인 바리새인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극적으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건이다.
사울의 체험은 부활의 주님을 보고 듣는 묵시적 체험으로 묘사됐다. 사울은 빛(빛, 큰 빛, 해보다 더 밝은 빛)으로 임하신 주님을 보았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사울은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게 됐다(행 9:8; 22:11). 사도행전 9장에 따르면, 그 때에 다메섹에 있던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주님의 보냄을 받아 사울에게 와서 안수 기도를 해줬는데, 그 즉시로 사울의 눈이 열리며 다시 보는 역사가 일어났다(행 9:10~18).
사도행전 9장의 그 단락에서 “다시 보다”(아나-블레포)라는 동사가 3회 나온다. 먼저, 아나니아가 환상 중에 받은 주님의 말씀에 나온다: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행 9:12). 다음에,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하여 기도했을 때 나온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행 9:17). 세 번째, 아나니아의 안수 기도 후에 즉시 사울에게 일어난 결과의 묘사에 나온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행 9:18a).
이 단락의 묘사와 거기에 사용된 “다시 보다”라는 동사가 3회 사용된 것을 통해, 누가는 사울의 다메섹 체험의 의미를 영적으로 해석하여 전달한다. 사울은 주 예수를 보지 못하는 영적인 맹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주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나사렛 이단을 따르는 이단자들로 정죄하고 그들을 박해하며 외국 성 다메섹까지 가서 성도들을 결박해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는 목적으로 그곳에 가고 있었다. 사울은 스데반 순교 때 그 장소에서 스데반에게 돌을 던지던 자들의 옷을 지키며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하게 여기던 사람이었다(행 7:58; 8:1).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와 고난을 받으면서도 주 예수를 믿는 믿음 때문에 기꺼이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여전히 복음을 전도하는 것을 보면서 분노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담대한 반응을 매우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가운데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 가지고 다메섹으로 급히 가던 상황에서 부활의 예수를 만나게 됐다(행 9:1~2).
부활의 예수께서 신비한 빛으로 그에게 나타나셨고 분명한 음성으로 그에게 말씀하시는 “살아계신 주 예수”를 보고 듣고 만나는 인격적인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사울은 그 체험 후에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다. 그는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않으면서 그에게 갑작스럽게 임한 이 신비한 경험을 놓고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놓고 놀라움과 답답함 속에서 기도하고 있었다(행 9:11). 그때 아나니아가 그를 찾아와서 그에게 안수하여 기도한 것이다(행 9:17).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하여 기도했을 때,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지고 그가 다시 보게 되었다”라고 묘사됐다(행 9:18). 이것은 사울의 영혼에 일어난 극적인 변화의 상황을 나타낸다. 그의 눈을 가리고 있던 “비늘 같은 것”은 그가 바리새인으로서 지금까지 철저하게 신봉하여 의존해 왔던 율법에 대한 바리새파의 엄격한 전통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자기의 종교적 전통을 신뢰했고 순종하기 위해 노력했다. 바리새파의 율법적 전통에 따르면, 기독교인들은 나사렛 예수라는 이단의 괴수를 따르는 이단자들이었으며 그래서 사울은 이단자들을 징벌하여 유대교 전통을 지키려는 마음으로 그들에 대한 박해의 선봉에 서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신비한 체험을 놓고 기도하는 중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와서 안수 기도했을 때, 그의 영혼의 눈을 가리고 있던 바리새파의 율법적 전통 너머에 부활의 주님이 계신다는 것이 한 줄기 강렬한 빛으로 다가오며 그의 영혼을 비추게 된 것이다(고후 4:6). 사울은 바리새인들이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의인의 부활이 “나사렛 예수”라는 분을 통해 성취된 것을 깊이 깨닫게 됐다.
사울의 영혼의 눈이 열리면서 그가 지금까지 살아왔고 알아왔던 모든 것들의 근원에서 새로운 존재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 것과 그에게 나타나신 것과 그 분이 모든 것의 근원이며 주인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여, 그에게 “다시 보는 눈”이 열리게 된 것이다. 사울은 이제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것을 다시 보게 됐으며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다시 보는 눈을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도 깨닫게 됐다(고후 5:17).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말미암아 사울의 영혼의 눈이 열리고 다시 보게 됐다는 것은 그의 인격(내면세계)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라는 말은 바로 사울의 영혼이 이처럼 그가 지금까지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겨왔던 바리새파의 율법주의 전통에서 벗어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영혼의 근본적인 변화를 나타낸다.
예수님의 맹인 치유 사역은 이와 같은 영적인 의미의 ‘개안’ 곧 “새로운 영혼의 눈”이 열리는 의미를 담은 구원 사건이다. 예수님은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했고 그래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살다가 멸망했을 죄인들의 눈을 열어 우리가 본래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해 이루신 새로운 구원의 세계를 보게 하시고 거기로 인도해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안에서 살게 하시는 구원자이다.
누가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근본 목적을 요약적으로 전달하는 말씀에서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시고”(눅 4:18)를 포함시켰다. 여기서 “다시 보게 함”은 앞에서 언급된 “다시 보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아나블렙시스)이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 곧 영원한 초월의 세계를 보게 하시며 알게 하시며 경험하게 하신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흑암에서 해방되고 사탄의 권세에서 자유하게 되어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며 거룩한 열매를 맺게 하시는 우리의 구원자이며 주권자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 같이 흑암의 권세에 갇혀 있는 인생들로 하여금 세계와 인생을 “다시 보게” 하시며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새로운 눈, 진정한 눈, 영원한 눈”을 주시는 살아계신 주 예수의 주권적인 권능의 행동이다.
마가는 예수님의 맹인 치유 사역에 담긴 이러한 영적인 의미를 진행적이며 점진적인 영적 성장의 의미와 함께 전달한다. 마가는 예수님이 벳새다에서 행한 맹인 치유 사건에서 영혼의 눈을 뜨는 영적인 의미를 가진 동사 3개를 사용했다: “쳐다 보다”(막 7:24), “주목하여 보다”, “밝히 보다”(한글성경에서 이 세 번째 동사는 ‘뚜렷하게’라는 부사의 번역을 생략). 예수님이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그는 “쳐다 보며” “사람들이 나무 같이 걸어다시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막 7:24)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의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았으며”(막 7:25a) 또 그가 나아서 모든 것을 “뚜렷하게 밝히 보았다”(막 7:25b). 여기에 나오는 세 동사 모두 ‘보다’라는 의미의 기본 동사가 전치사와 합성하여 만들어진 합성동사들이다. 이 동사들은 맹인 치유 사역의 맥락에서는 영의 눈이 열리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그 열리는 정도가 점차로 성장하여 모든 것을 밝히 보는 상태로 성장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쳐다 보다”(‘아나-블레포’)는 동사는 앞에서 언급된 맹인 치유 사역과 사울의 다메섹 사건에서 사용된 “다시 보다”로 번역된 동일한 동사다. “주목하여 보다”(‘디아-블레포’)라는 동사는 “관통하여 보다,” “통찰하여 보다,” 혹은 “깊게 들여다보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세 번째로 사용된 “밝히 보다”(‘엔-블레포’)는 동사는 “통찰하여 보다”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모든 것을 파악하고 전체적인 의미를 알게 되는 상태”를 나타낸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의 눈을 열어주실 뿐 아니라, 그 영의 눈이 점점 더 밝아져서 영의 세계를 더 깊게 보게 하시고 나아가 모든 것을 파악하고 전체적으로 밝히 보게 만들어주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의 세계로 점점 “더 깊게, 더 높게, 더 넓게, 그리고 더 멀리” 파악하고 알아가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성장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이다(엡 4:13).
김광수 특임교수
한국침신대 신학과(신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