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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보다 순종(삼상15:1~35)

이희우 목사의 사무엘서 여행-16

뉴요커들에게 사랑받는 뉴욕 맨하탄 중심의 센트럴파크는 무려 100만 평이 넘는 공원이다. 사람들은 이 금싸라기 땅에 고층건물을 올리면 부가가치가 엄청날 텐데 왜 이렇게 크게 만드냐고 했지만 도시설계사 로버트 모지스 (Robert Moses)는 “이 엄청난 도시에 이만한 공원이 없다면 훗날 이 공원보다 훨씬 더 큰 정신병동을 지어야 할것”이라고 했단다.

 

가치가 흔들리는 시대다. 눈에 보이는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왕이 된 사울은 듣는 귀가 막히고, 보는 눈이 희미해지고, 깨닫는 능력이 줄어들면서 교만해진다. 말씀을 무시하고 오버하며 남 탓하다가 결국 하나님 눈 밖에 난다. 사무엘상 15장도 하나님 눈 밖에 난 이야기인데 그때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했던 말이 “제사보다 순종”이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

‘가서 아말렉을 진멸하라’(3절), 이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진멸하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헤렘’(herem), 마치 번제처럼 다 태워라, 소멸하라는 것이다. 좀 잔인하고 충격적이지만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와 유아, 그리고 그 소유물까지 다 제거하라고 했다. 이유는 출애굽 때 아말렉이 이스라엘에 행한 악 때문이다(2). 아말렉은 유다 남부 지역에 거하는 베두인족, 이스라엘이 급하게 출애굽하여 이곳을 통과할 때 후미를 급습했던 족속이다. 모세의 기도와 여호수아의 용맹으로 이기기는 했지만 이스라엘에게는 뼈아픈 추억, 남도 아닌 에서의 손자(창36:12), 형제국인데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후미를 급습했다.

 

하나님도 마음이 많이 아프셨을까? 신명기에서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신25:17~19). 많이 아프셨다. 그런데 세월이 많이 흘렀다. 학자들은 출애굽 연대를 보수적으로는 기원전 1400년대 중반, 비평적으로는 1200년대 중반으로 잡는다. 그리고 사울왕 시대는 1000년대 중반, 그렇다면 짧게는 200년, 길게는 무려 400년 전의 일이다. 그때 일을 이제 복수하시겠다? 사실 좀 의아하지만 이게 하나님의 결정이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는 분이시다.

 

그렇다면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의 잔인성보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보며, 우리는 악한 일은 반드시 심판받고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불순종이 파탄을 초래하다

사울 왕은 아말렉을 치기는 했지만 아각 왕을 살려두고 좋은 것과 기름진 것은 남긴다(9). 자기 명예와 물욕을 채우기 위한 취사선택, 자기 판단에 따른 명령 불복이다. 급기야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신다(11절, 35절). 뜻밖이지 않나? 하나님이 어떻게 후회하시나? 창세기에서 노아 홍수 이전의 타락상을 언급할 때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셨는데(창6:6) 그 ‘한탄’ 이 이 후회와 같은 단어다. 기대가 커서 실망도 컸을까? 하나님의 마음이 떠난다. 이스라엘의 첫 왕이라 첫 단추를 잘 끼우기를 바라시던 하나님이 이렇게 후회하셨다는 것은 그만큼 실망이 컸다는 뜻 아닐까?

 

성경에는 더러 이렇게 좀 과하다 싶은 경우가 있다. 여리고 전투에서 외투를 몰래 숨겼던 아간 가족이 죽임을 당한 것이 그렇고, 소유를 판 재산 일부를 감추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세트로 죽임을 당한 것도 그렇다. 물론 사울 왕이 억울하다는 것은 아니다. 일방적으로 당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울 왕은 교정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지만 반성이나 교정은커녕 늘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이다. 본문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무엘과의 대화를 보면 사울의 의지와 변명이 뚜렷이 드러난다.

 

그는 자기 기념비까지 세우고(12), 뻔뻔하게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13) 그런다. 잘못에 대한 인식이 없다. 그리고 능청맞게 거짓말도 잘 한다. “백성들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15), 변명이며 책임 전가다. 왕의 허락이나 묵인 없이 어떻게 백성들이 짐승을 살려두거나 끌고 올 수 있나? 사울이 하나님을 ‘당신의 하나님’이라 한 것도 어이없다.

 

사무엘은 지난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라며 왕이 초심을 잃고 교만해져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탈취하기에만 급급, 결국 악을 행하였다고 지적한다(16~17). 이때라도 무릎을 꿇었어야 했다. 하지만 사울은 궁색한 변명만 늘어놓는다(20~21). 백성을 탓하며 핑계만 댄다. 거룩한 ‘제사’까지 볼모 삼아 계속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22)고 했다.

 

또 사무엘이 “하나님이 당신을 버리셨다”(23)고 하자 사울 왕은 결국 자신의 범죄를 자백한다.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범죄하였나이다”(24). 속된 말로 똥줄이 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백성들의 말을 더 두려워했다고 실토한다. 요즘 말로는 여론을 더 중시했다는 말이다. 사울은 용서를 구하며 여호와께 경배하고 싶다(25)고 하지만 사무엘은 단호하다. 재차 “여호와께서 왕을 버렸다”고 선언한다(26).

 

그리고 돌아서는 사무엘을 사울 왕이 붙잡다가 사무엘의 옷이 찢어진다 (27). 그래도 사무엘은 냉정하다.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28) 옷이 찢어졌다는 표현이 마치 사무엘과 사울, 하나님과 사울 사이가 갈라지고, 사울의 왕국이 파열되는 모습을 상징하는 것 같다.

 

뒤늦게 사울이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30)라며 매달리기는 하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더 의식한다. 자신이 얼마나 제사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만천하에 알리고 싶고, 자신이 살진 양과 염소를 살려둔 것을 정당화하고 싶고, 사무엘이 자신을 지지하고 있음을 과시하고 싶을 뿐이다. 구제 불능이다.

 

성경은 결국 사무엘이 돌이켜 사울과 함께 가서 여호와께 경배했다(31)고는 하지만 사무엘은 아말렉 왕 아각을 처단했고(32~33),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않았다고 한다(35). 사울 왕이 파탄난 것이다. 사울 왕의 파탄은 충분히 돌이킬 기회가 있었지만 끝까지 책임을 전가하고 자신의 안위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 큰 죄를 짓고도 회개했던 다윗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단 한 번도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았다. 그러니 파탄은 그의 선택이고 그의 책임, 자기 욕심만 채운 불순종이 파탄을 낳은 것이다.

 

순종이 우선이다

본문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듣다. 청종하다”라는 단어다.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 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1). 세운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왕은 세워주신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어야 했다. 정치적으로 계산하고 실리를 따지면 안 된다. 좀 컸다고, 힘들다고 딴생각하면 안 된다.

그런데 사무엘이 사울을 만났을 때들은 소리는 소와 양의 울음소리, 하나님께 불순종했다는 소리뿐이다. 그래서 사무엘은 사울의 죄를 이렇게 지적 했다.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19) 그리고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22) 목소리 청종, 순종으로 번역된 단어가 히브리어로 ‘쉐마’ (Shema) 곧 ‘듣다’라는 뜻의 단어다. 하나님은 심지어 제사보다도 순종을 기뻐하신다고 했다.

 

물론 제사가 중요하다. 그러나 형식적인 제사, 순종이 없는 제사는 하나님이 싫어하신다. 제사가 그림자라면 순종은 본질, 성경에는 수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지만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다. 어떤 상황에서든 말씀을 우선으로 여기고 말씀에 절대 순종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이나, 교회의 전통이나 관습이 아니라 말씀이다.

 

제사보다 순종이다. 그래서일까? 본 회퍼는 “믿는 자만 순종하고 순종하는 자만 믿게 된다”는 말이 지금 우리의 삶에 경종을 울리고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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