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찰스 파햄의 신학
찰스 파햄의 신학에 있어서 그는 구원의 위기체험을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양육에 의한 점진적인 개종을 거부하고, 오직 “위기체험(crisis experience)에 의한 개종을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분명하고 순간적인 구원의 체험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성화를 가르쳤으며, 또한 그는 성령침례의 첫 증거가 바로 방언이라고 가르쳤다. 나아가 그는 믿음치료의 교리(The Doctrine of Faith Healing)를 가르치며 사역했고, 여기에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 왕국의 수립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들의 부활이 환란 전에 있을 것이라고 믿는 전천년주의를 가르쳤다. 이는 오순절운동의 신학이 확정된 것은 오순절운동의 아버지라 불리는 찰스 파햄 목사의 가르침에서 비롯됐다. 그는 캔자스 주 토페카에 있는 성경학교를 통해 오직 성경만을 교과서로서 가르쳤으며, 바로 그가 그르쳤던 이 성경안에서 발견한 성령침례의 성경적 증거가 방언을 말함이라고 확정을 지어 오순절 성령운동의 초석을 놓았던 것이다.
로스웰 플라워(J Roswell Flower)는 이 결정에 대해 현대 오순절운동의 출생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토페카의 부흥에 있어서 독특하고 이전 부흥운동과 구분되는 것은 방언을 말하는 현상이 성령침례의 경험에 의한 물리적 증거로 연결된 것이다. 1950년에 찰스 파햄이 텍사스 휴스턴으로 옮겨 부흥회를 개최해 결실을 거두고 또 토페카에 세웠던 규모의 신앙 성경학교를 세워 가르칠 때 오순절 부흥운동의 실질적인 아버지가 된 성결교단의 윌리암 시무어가 그 학교에서 찰스 파햄의 교리 곧 성령침례를 받아야 하고 그 침례를 받으면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성령침례의 초기 증거라는 가르침을 진리로 확신했다.
이와 같이 찰스 파햄에 의해 시작된 토페카 부흥의 의미를 살펴볼 때 첫째, 이는 방언을 성령침례의 첫 증거로서 규정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물론 토페카 부흥 전에도 방언현상이 나타났으며, 또한 19세기에는 성령침례에 대해서 미국 교회들이 널리 가르치고 있었지만, 이 두 요소가 함께 연결되지는 않았는데, 토페카 부흥에서 처음으로 이 둘이 함께 연결됐다는 점이 중요하다. 둘째로 이는 토페카 부흥집회나 탬프집회에서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신학교에서 이 사실이 개발됐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들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면서 깊은 기도를 함으로 성령침례의 증거가 방언이라는 사실을 나름대로 확인하게 됐던 것이다. 셋째로 토페카의 부흥은 정통 기독교의 주요 흐름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처음의 교회들은 오순절운동이 새로운 교리를 말하는 것같이 생각했으나 교회의 정통적인 가르침에 새로운 것을 첨가한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점차로 알게 됐다. 오순절 학자였던 도날드 기(Donald Gee)는 “오순절운동은 크리스천 신앙의 근본적인 것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는다. 이것은 아무것도 첨가해서는 아니된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타인들과 충만한 그리고 완전한 교제 안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한 분열을 염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3. 윌리엄 시무어(Wiliam T. Seymour)와 그 이후의 성령사역 이해
1) 윌리엄 시무어와 찰스 파햄과의 만남
찰스 파햄 목사는 토페카나 휴스턴, 텍사스 같은 도시에서는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 일으켰지만, 아직은 미국 전역에서 방언으로 증명되는 성령침례의 역사로 불붙게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미국 전역에 오순절적인 부흥을 일으키게 할 인물이 있었는데, 이는 그의 제자 중의 l한 사람인 윌리엄 시무어였고 그는 이를 위해 하나님의 택하신 도구로 준비되고 있었다. 시무어는 1906년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흑인 성결 교회로부터 설교 요청을 받고 장차 교회 역사상 가장 중요한 부흥성회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는 집회를 인도했다. 즉 이는 1906년부터 1909년까지 진행된 아주사 거리의 역사적인 부흥운동으로서 그동안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늦은 비 성령의 역사”가 이제 막 시작됐던 것이다. 1831년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목사인 에드워드 어빙이 이를 시도하려다 실패했지만, 1906년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시무어에 의해 성취된 것이었다. 예컨대 1906년 시무어가 로스앤젤레스로 청빙되어 부흥회를 개최했을 때, 1906년 4월 9일에 거리에 몰려든 그의 청중 가운데서 다수의 사람들이 성령침례를 받고 방언을 말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아주사 거리에서 3년간 부흥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해 성화된 성도들로 하여금 성령침례를 받고 방언을 함으로써, 성령 침례를 받은 그 증표가 바로 방언이라고 말하는 제1기 오순절 성령운동의 신학으로 확정된 일이다.
윌리엄 시무어 이후의 성령사역
윌리엄 시무어 이후의 성령의 사역은 1906년 12월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성결운동을 일으킨 목회자 캐쉬웰이 아주사 거리로 찾아옴으로서 비롯됐다. 그는 성령침례에 대한 체험을 하면서 방언을 말하게 됐으며, 그는 이 체험에 힘입어 자신이 “성령의 불을 던지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고향에 돌아온 이듬해인 1907년 1월 노스캐롤라이나의 던에 낡은 건물을 빌려 한 달 동안 부흥집회를 가졌다. 이 집회결과 수백 명의 남부 성결교단의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늦은 비를 체험하게 됐다. 그리고 성결교단은 테네시주의 클리브랜드 하나님의교회교단처럼 오순절 성령운동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러자 오순절성결교회의 지도자가 캐쉬웰이 주장하는 “성령충만의 최초의 증거로써의 방언”을 수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자신이 개척했던 교단을 떠나고 말았다.
이 뿐만 아니라 이때를 맞추어 노스캐롤라이나 주에는 새로운 교단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자유의지 침례교회 같은 교단들이 생겨나 오순절적 체험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자유의지 침례교단은 오순절 자유의지 침례교회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기도 하였으며, 특히 캐쉬웰에 의해 이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이곳을 가리켜 “동부의 아주사 거리”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시무어 이후 오순절운동의 사역은 캐쉬웰, 피니와 팔머 무디, 그리고 심슨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성령의 불길이 타올랐던 것이다.
이와 같이 찰스 파햄으로부터 시작되어 윌리엄 시무어의 아주사 거리선교에서 본격화된 제1기 오순절운동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은 이후 성결과 봉사와 전도활동을 위해서는 제2의 은혜인 성령침례를 받아야 하며, 이 성령침례를 받게 되면 그 증거로서 방언이 표식으로 따르게 된다는 방언운동으로 전개됐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