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운동은 1906년 이후 급속한 양적 성장을 이루어 가면서 전 세계로 확산되어 나갔다. 그 가운데 주장하는 교리와 경험의 차이, 흑백간의 갈등, 지도력의 차이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수많은 교파들이 형성되고 또 분열되기도 했다. 이것을 흔히 고전적 오순절 운동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오순절운동의 영향력은 드디어 교파의 장벽을 넘어서 전통적인 기성교회 안에까지 미치게 됐다.
이런 현상이 시작된 것은 1960년대였는데, 이때 이후 전통적인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자기 교회를 떠나지 않은 채 이 운동에 가담하고, 자기들 교파 안에서 이 운동을 확산시켜 나가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신오순절운동(Neo Pentecostal Movement)” 혹은 “카리스마 운동(Charismatic Movement)”이라고 한다. 그들도 성령침례 교리와 성령의 역사에 의한 여러 가지 은사, 즉 카리스마들을 추구하게 됐다. 이것은 전통적인 종교개혁 교회인 루터교회, 성공회와 로마가톨릭교회까지 포함되는 거대한 물결이었다. 물론 1980년대에 이르러 이 운동은 약간 다른 모습으로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은 약간 회의적이었으나, 일부는 이 운동의 능력을 자기들 안에 수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풀러 신학교의 교수인 피터 와그너 자신이 여기에 가담하면서 스스로 이 운동을 “제3의 물결”이라고 명명했다.
드디어 20세기 중반쯤에서 새로운 무리의 오순절주의자들이 지평에 나타났다. 이 사람들 또한 보다 심오한 제2의 그리고 특별하게 나타나는 성령침례의 체험에 대한 오순절주의자들이라고 일컬어지게 됐다. 대부분의 신오순절주의자들은 표준적 오순절교파 밖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신오순절주의자들은 개신교도들이었으며 몇 년 후에는 가톨릭교도들도 참여했다. 이들은 오순절 체험을 발견한 이들이었다. 신오순절운동은 점차적으로 “카리스마 운동”이란 이름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 주로 오순절파 운동은 1959년까지는 하나님의 성회, 연합오순절교회, 복음교회 등의 교단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1960년 4월 3일 베네트(Dennis Bennett)가 성령침례를 경험하고 방언을 말한다는 이유 때문에 캘리포니아주 반 누이스에 위치한 성 마가 에피스코팔 교회(St. Mark’s Episcopal Church)의 목사직을 사임함으로써 그 이후부터 각 교단의 장벽들이 무너지고 신오순절파 운동이 태동하게 됐다.
이때로부터 신오순절파 운동, 즉 은사운동이 감리교회, 장로교회, 침례교회, 루터교회, 그리고 로마가톨릭교회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널리 확산됐다. 이렇게 신오순절파 운동을 여러 곳으로 퍼지게 하는 데에는 “국제 순복음 실업인회”(Full Gospel Business Men’s Fellowship International, FGBMFI)의 영향과 기여가 매우 컸다.
신오순절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교단적 배경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신오순절파 운동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일관된 교리체계를 발견하기 힘들다. 하지만 하나의 공통점은 예수를 믿은 이후 어느 시점에서 성령침례의 경험 즉 “제2의 축복”을 경험해야 한다는 점이다. 신오순절파는 성령침례를 받은 증거로 방언을 말하거나 혹은 다른 성령의 은사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들은 성령침례 받은 증거를 방언으로 못 박지 않고 다른 은사를 체험해도 성령침례 받은 것으로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기 신오순절운동은 이같은 주장으로 인하여 기독교 공동체 안에 영적으로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구분을 낳고 말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신오순절운동이 추구하는 오순절신학은 무엇인가? 럿셀 스피틀러(Russell P. Spittler)는 신오순절운동의 오순절신학은 강범위한 신조나 신학적 저술보다는 구전전승에 의해 성립되었다는 점에서 또 다른 한계가 있지만, 오순절주의 신학이 교회를 위하여 주로 기여하는 바는 하나님에 대한 역동적인 체험을 옹호해 주는 측면이 있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오순절신학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과 현존의 참 가치에 대한 신뢰가 그 근본이 된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그의 현존하시는 능력의 풍부한 증거를 제공하시는 손닿는데 가까이 계신 하나님의 신학을 뜻한다. 이 신학은 그 자체가 깊고 지속적인 하나님의 체험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