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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살롬의 죽음(삼하7:18~29)

이희우 목사의 사무엘서 여행-41
다윗 가정의 비극(5)

도피한 지 며칠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다. 다윗은 쿠데타를 일으킨 아들 압살롬과 요단강 지역에서 드디어 무력 충돌을 하게 된다. 부자간 권력 다툼으로 일어난 내전, 이 내전으로 다윗은 사랑했던 아들 압살롬을 잃는다. 이 또한 다윗 가정의 비극이었다.


전쟁이 일어나다
오랫동안 전쟁까지 준비한 압살롬이 아버지의 권력을 빼앗겠다고 야심차게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지만 다윗은 수많은 전쟁을 치른 백전 노장, 군대를 집결시킨 뒤 그 동안의 전투 경험을 살려 병력을 세 부대로 나눈다. 그리고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자신이 직접 전선으로 나가 전투를 지휘하려 한다. 하지만 부하들의 간청(3)으로 직접 나가지는 않았다.


대단한 전쟁이 벌어졌다. 성경은 다윗의 군대와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전쟁이라 했다. 압살롬을 추종한 쿠데타 세력을 ‘이스라엘 백성’이라 했는데 민심이 떠났다는 뜻이며, 그만큼 다윗의 세력이 약세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전쟁은 다윗의 부하들이 이긴다(7).


흥미로운 것은 본문에 전쟁에 대한 실질적인 기록이 딱 세 절밖에 없다는 것이다(6~8). 나머지 말씀은 죄다 한 사람 압살롬의 죽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또 희한한 것은 전쟁이 시작되는데 다윗이 전쟁 승리를 독려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5) 이게 무슨 명령인가? 세 부대를 이끌고 나갈 지휘관들에게 다윗은 쿠데타 괴수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우하라는 어이없는 명령을 내렸다.


안락하고 영예로운 보위에서 자신을 밀어낸 반역자, 후궁들을 강간하고 자신을 삭막한 광야로 쫓아낸 패륜아, 그것도 수년 전부터 쿠데타를 계획하고 공작을 펴고 자기를 죽일 계략을 꾸민 쿠데타 수괴, 어쩌면 그의 계략이 성공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마치 수년 전 사울에게 쫓기던 악몽을 꾸는 것 같다. 그때는 젊었지만 지금은 젊지도 않다. 그런데 자신을 위해 싸우러 나가는 지휘관들에게 그를 너그럽게 대우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유진 피터슨은 이 명령은 결코 감상에서 나온 명령이 아니라고 했다. 또 시므이의 저주하는 말을 들으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아히도벨의 배반을 통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삶을 회복하고, 압살롬의 반란과 경멸을 통해 사랑의 삶을 회복하고, 생애 최악의 버림받는 경험을 통해 압살롬에 대한 사랑이 살아났기에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이라고 했다. 한 마디로 다윗은 싸우기 싫었다.


지휘관들이나 백성들은 이 말을 무겁게 들었다. 그래서 실제 전쟁에서 압살롬을 죽일 기회가 주어졌을 때 주저한다. 정말 다윗은 승리보다 아들 압살롬의 안전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승리한 후에도 기뻐하기는커녕 아들의 죽음에 애절하게 탄식한다. 오죽하면 요압이 이러다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까지 했을까?
하지만 나라가 두 동강이 나 한판 대전을 벌이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안전에 집중하고, 성경도 청년 압살롬의 생사에 집중한 것을 우리는 잘 봐야 한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게 뭔지를 깨달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전쟁은 마치 전자오락 게임하듯 승패에만 매몰되어 사라진다. 이게 전쟁의 비극이다. 그런데 오늘 성경 본문은 역사의 방향을 결정짓는 전쟁의 긴박감이나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왕도 평범한 백성들이 겪는 비극을 똑같이 겪는다는 것, 살리는 것이 가장 소중함을 보여주고 있다.


다윗의 기대와는 달리 압살롬은 그 전쟁에서 죽었다. 그것도 성경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던 머리채 때문에 죽었다고 했다. 좀 코믹하지 않나? 노새 타고 가다가 상수리나무에 머리채가 걸려 나무에 매달렸다가 죽임당했다. 나무에 걸린 압살롬을 발견한 다윗의 군사들은 그를 죽이지 못했지만 보고를 받은 요압이 달려가 압살롬을 죽인다. 마치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는데 개인적인 감정으로 지체되는 것 때문에 화가 났던 것 같다. 창으로 심장을 찌르고, 열 명의 부하가 한꺼번에 달려들어 압살롬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한다. 결국 압살롬이 죽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전쟁은 다윗 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다윗의 명령을 무시한 모압은 어떻게 되나? 사울 왕의 군대장관 아브넬을 죽이고, 다윗의 명령으로 우리야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 압살롬을 복권시키기도 했던 그가 다윗의 명령을 어기고 압살롬을 죽였다. 그가 압살롬의 군대장관 아마사도 죽인다. 누구보다도 다윗을 심기를 냉철하게 잘 살폈던 사람, 어쩌면 압살롬 죽이는 것도 다윗을 위한 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왜? 압살롬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다윗이 꽃길을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윗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아니 설령 알았어도 정말 아들을 살리고 싶어한 다윗, 나중에 그 아들 손에 죽게 되더라도 살리고 싶었던 다윗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요압은 다윗의 정적들을 제거하는 일에 앞장섰지만 결국 다윗의 폭주를 가속화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없었다면 다윗은 또 다른 모습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 망나니처럼 칼을 휘두른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선한 길을 걷도록 도운 것도 아니다. 그래서 요압은 결국 솔로몬이 등극하자 보복을 피해 달아나다 제단 뿔을 잡은 채 죽임을 당한다. 


승리의 소식을 듣다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는 승리의 소식을 자신이 가장 먼저 전하려 했고, 눈치 빠른 요압은 구스 인을 전령으로 보내려 한다. 구스 인은 아프리카 흑인, 요압은 이질적인 인물을 전령으로 보냄으로써 다윗의 분노의 파장을 최소화하려 한다. 결국 두 명의 전령이 마치 경주하듯 승전보를 전하려고 달린다. 멋지지 않나? 좋은 소식 들고 먼저 가려는 자세가 너무 멋지다. 


한편 다윗은 애타게 전선의 소식을 기다렸다. 그런데 파수꾼이 전령이 온다고 외친다. 다윗은 즉각 “그의 입에 소식이 있으리라”(25), ‘소식’은 ‘유앙겔리온’, ‘복음’이라는 말이다. 또 한 전령이 달려온다는 외침을 들었을 때도 반응은 역시 “소식이 온다”는 것이었다(26). 그는 온통 좋은 소식을 고대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가 기대하는 좋은 소식은 이겼다는 소식과 아들 압살롬은 살았다는 소식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먼저 도착한 아히마아스는 승리의 소식을 전했다(28). 그런데 다윗은 그 말보다 관심이 딴 데 있다.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29) 아히마아스가 답을 못한다.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다. 거짓 보고다. 하지만 뒤이어 달려온 구스 인 전령은 압살롬이 죽었음을 보고한다(32). 좀 지혜로울 필요가 있는데 그는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압살롬이 죽었다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고한 것이다. 


다윗이 탄식하다
다윗에게는 압살롬이 더 이상 적이 아니다. 그 동안 겪었던 고통은 수년간 아들을 거부하며 굳어졌던 마음을 이미 다 풀어놓았다. 그래서 싸우고 싶지 않았다. 다윗은 반복해서 압살롬을 “청년 압살롬”(15, 29, 32)이라 부른다. 청년이 아니라 어린 ‘아이’라는 뜻이다(70인역, ‘파이다리온’). 압살롬은 쿠데타의 수괴지만 다윗에게는 아이요 아들일 뿐이다. 그런데 그 아들이 죽었단다. 33절과 19장 4절을 보면 자녀를 잃은 어버지의 애절함, 애끓는 비탄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성경 어디에도 이런 비통함을 표현한 구절을 찾을 수 없을 정도다. 자녀를 잃었다는 점에서 여느 부모와 다를 바 없는 고통을 느꼈다. 전쟁이라는 악을 고발하기 위해서라도 다윗의 이 탄식은 더 울려 퍼져야 할 것 같다. 


탄식하는 다윗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을 떠올린다. 십자가에서 죽은 아들 예수를 안고 탄식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그린 작품, 예수의 고통은 모든 인간의 고통이고, 마리아의 탄식은 인간이 당하는 모든 슬픔을 대변한다. 


피카소의 ‘게르니카’(1937)라는 작품이 있다. 현대판 피에타인데 독일군이 히틀러의 명령으로 스페인 북부 게르니카란 지역을 1937년 4월 26일 오후 4시 30분경 24대의 전투기로 무차별 폭격했던 참상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한 도시에서 1500명 이상 사망했고, 인구의 ⅔가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 당시 56세였던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는 이 폭격 뉴스를 들은 뒤 분노에 차서 전 세계에 이 만행을 알리고자 이 작품을 남겼다. 세로 349cm, 가로 776cm에 이르는 대작, 단순한 선과 특징만 살려 검은색과 회색의 무채색만으로 무한한 슬픔과 공포를 그렸다. 그림 왼쪽의 죽은 아기를 안고 넋을 잃은 어머니는 가히 현대판 ‘피에타’같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힌 그 어머니의 표정은 완전 넋이 나간 모습이다. 


다윗의 애절한 탄식을 결코 잊으면 안 된다.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권력에 대한 욕심, 욕망을 좇아서 산 결과가 무엇인지를 절감하기 때문이다. 생명을 잃고 난 후에 울기보다 생명을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전쟁의 상흔으로 고통스럽게 지내는 분들과 이산가족들께 하늘의 위로가 임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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